본문 바로가기
로마서 말씀 묵상

하나님의 성전 짓기와 인간의 당 짓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1.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 하심이니라."(로마서 2:6~11)

어느 작은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습니다. 형은 부지런하고 야심이 넘쳤습니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집을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재료를 고르고, 설계를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벽돌을 쌓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감탄했고, 형 자신도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가 그토록 공들여 쌓은 집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습니다. 기초가 모래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달랐습니다. 그는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짓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집을 지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아버지 곁에 머물렀습니다. 아버지가 손을 뻗어 집을 지어주셨습니다. 그 집은 폭우에도, 홍수에도 끄떡없었습니다. 이 단순한 이야기가, 사실은 성경 전체가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원래 없었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불러내어진 존재들입니다. 그 창조의 은혜를 인정하고 찬송하는 것, 그것이 피조물에게 주어진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나는 스스로 설 수 있다"고, "나의 됨됨이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선악과는 단순히 하나의 과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도 나는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선언의 상징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놓으려 한 그 첫 번째 시도, 그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 충동을 우리는 매일 경험합니다. 아이가 처음으로
"내가 할 거야!"라고 고집을 부릴 때, 그 안에는 기특함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 드러납니다. 어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공을 우리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 여기고, 우리의 구원도 어느 정도는 우리의 열심이 기여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은 그 느낌 자체를 절대 인정치 않으십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솔직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거기서 인간들은 숨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성을 쌓고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이름으로, 우리가 주도하여 하늘을 향한 길을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온 수많은 종교들이 바로 이 구조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라 합니다. 힌두교의 어떤 계통은 아예 인간 안에 신성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유교는 끊임없는 자기 수양으로 군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다들 인간의 가능성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힘과 지혜와 열심을 지붕 삼아 하늘에 이르는 계단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형태는 달라도 구조는 같습니다. 그것이 인간들의 집 짓기, 당 짓기입니다.

하나님은 그 탑을 무너뜨리십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사람들을 흩으십니다. 흩으심은 심판인 동시에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래 위에 쌓인 탑은 결국 무너지기 마련인데, 하나님이 먼저 무너뜨리심으로 더 큰 재앙을 막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순히 부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수신 자리에 반드시 덮으십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그 유명한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운행하다'는 히브리어 '라하프'는 암탉이 알을 품듯이 온몸으로 덮어버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에 내려앉으셔서 품어 안으시는 것, 그것이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창조란 하나님이 먼저 덮으심으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도 스스로 존재가 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후,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
'생기(루아흐)'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불어넣어지자 그때서야 그 사람이 '생령', 곧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성령의 덮으심으로 비로소 산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출발점입니다. 그 출발점을 잊은 것이 타락이었고, 그 출발점으로 다시 데려가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방주는 단순한 생존용 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습니다. 방주 안에서는 사자와 어린양이, 늑대와 토끼가 함께 지냈습니다. 자연 세계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방주라는 공간, 곧 하나님의 덮으심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하나 되게 한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방주를 지으신 분이었습니다.

노아 이야기가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말로 시작된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것이 결론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탄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훌륭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방주 이야기의 끝자락에 나오는 셈의 아버지 하체 덮음 사건이 그것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을 때, 함이 그것을 보고 떠들었지만 셈과 야벳은 얼굴을 돌리고 아버지를 덮어드렸습니다. 그 덮음이 구원의 그림입니다. 노아가 깨어나 셈에게 축복을 선언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덮으심의 은혜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임을 성경은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성막 건축 명령을 내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공교한 일을 하게 하겠다"(출 31:2~3). 성전을 짓는 데 가장 먼저 가입되는 것이 성령, 곧 지혜의 영입니다.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으라"(출 28:3).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는 인간의 힘으로 지어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먼저 덮여야만 지어집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교한 기술을 동원하고 귀한 재료를 가져와도, 성령의 개입 없이는 그것은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솔로몬도 성전을 다 짓고 나서 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솔로몬이 스스로 자신이 지은 성전의 한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지은 성전이 하나님의 참된 처소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하신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인간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46년을 지어온 건물을 사흘에 짓겠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쌓아 올린 옛 성전은 부수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성전이 세워집니다.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언을 읽으면서
'성공하는 삶의 비결'을 찾습니다. 부지런한 자는 형통하고, 게으른 자는 가난해진다는 구절들이 그 생각을 강화합니다. 그런데 잠언을 그렇게 읽으면 잠언의 심장을 놓치게 됩니다.
잠언의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잠 1:1). 그냥 솔로몬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 속에서 약속된 메시아적 왕, 그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었던 근거가 다윗 언약이었고, 그 성전을 짓는 데 지혜의 성령이 가입되었다면, 솔로몬의 지혜가 담긴 잠언은 성전 짓기, 곧 십자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8장에서 지혜가 직접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었으며"(잠 8:22~30). 지혜가 창조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지혜는 수면 위에 운행하던 하나님의 신, 성령입니다. 에덴의 창조에 성령이 지혜로 개입하고 계셨고,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도 지혜의 성령이 개입하셨습니다. 성경은 에덴 창조와 성전 건축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9장은 이 구조를 더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잠 9:1~6). 지혜, 곧 성령이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지혜 없는 자들을 초대합니다. 내 음식을 먹으라고, 내 포도주를 마시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만찬의 언어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지혜의 성전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잠언을 읽을 때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귀족 청년이 포도원을 지나다가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검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오빠들의 강요로 포도원에서 종일 일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포도원은 가꿀 겨를도 없었습니다(아 1:6). 그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곱고 단정한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그런데 그 청년이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것도 왕처럼, 온전히, 어떤 조건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이 아가서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는, 메시아이신 왕과 교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교회입니다. 자격이 없고, 화려하지도 않고,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그녀를 왕의 신부로 만들어냅니다. 그녀의 노력이 아닙니다. 왕의 불가항력적인 사랑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누이, 나의 신부'라고 부릅니다(아 4:9). 누이는 같은 생명의 근원에서 나온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신부를 '잠근 동산'이라 부릅니다(아 4:12). 하나님이 잠가두셨다가 때가 차면 여시는 동산, 새 에덴입니다. 교회는 인간들이 세운 종교 단체가 아닙니다. 왕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살아있는 동산입니다.

욥은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재물을 탐내지 않았고, 음욕을 품지 않았으며, 종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녀들이 혹시라도 마음으로라도 죄를 지었을까 봐 수시로 번제를 드렸습니다(욥 1:5). 완벽에 가까운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부수십니다. 자식들이 죽고, 재산이 사라지고, 몸에 병이 납니다. 욥은 처음에는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 1:21). 그런데 그 고백이 무너집니다. 친구들이 "네가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하자 욥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맞섭니다. 결국 두 진영 모두 같은 전제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네가 지혜가 있느냐, 능력이 있느냐." 욥이 할 말을 잃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백합니다.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3~6). 의인 욥이 도달한 마지막 자리가 회개였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인생이 도달해야 할 자리입니다. 내 의로움을 내려놓고, 내 됨됨이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상상할 때, 이 세상에서 원하지만 얻지 못한 것들이 모두 갖추어진 곳으로 그립니다. 원하는 음식, 원하는 관계, 원하는 평안.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인간 중심의 천국 그림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로 채워진 나라, 그것도 결국 인간이 설계한 바벨탑의 최고급 버전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하늘나라의 핵심은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입니다. 그분이 직접 장막이 되셔서 우리를 덮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는 것입니다.

눈물이 씻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드디어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존재를 완성해 보겠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마침내 벗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짐은 처음부터 지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덮으시면 그 짐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거기에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고 아픔이 없는 것입니다.
4절에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할 때, '지나가다''아펠코마이', 없어지다, 곧 죽음입니다. 처음 것들이 죽어야 합니다. 나의 자율성, 나의 주체성, 나의 힘으로 존재를 완성해 보겠다는 그 첫 번째 충동들이 죽어나가는 자리, 그것이 성도의 인생길입니다.

한 건설사가 집을 짓겠다고 약속하면서 보증금을 먼저 내어줍니다. 그 보증금은
'나는 이 계약을 반드시 완료하겠다'는 확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고후 5:5). 하나님의 성전 건축은 시작되었고, 반드시 완료될 것임을 확약하는 보증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우리의 육신을 지붕으로 삼아 지으려 했던 집, 나의 열심과 노력과 종교적 성취를 기초로 하여 하늘에 이르려 했던 그 장막 집이 무너집니다. 그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무너짐이 하나님의 성전 건축이 시작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 그분은 하늘 성전의 마지막 돌을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쌓아 올린 옛 성전은 부수어졌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 안으로 우리가 불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두 형제 이야기에서 형의 집이 무너진 것은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너짐이 오히려 은혜였습니다. 모래 위의 집에 계속 살았더라면 그는 영원히 폭우를 두려워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동생이 아버지 곁에 머물렀던 것은 무능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지혜였습니다. 아버지가 지붕이 되어주시는 집에는 폭우도, 두려움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누가 집을 짓는가?"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다."

에덴에서 혼돈을 품으신 성령이 지으셨고, 방주에서 은혜의 덮으심으로 지으셨고, 성막과 성전에서 지혜의 영으로 지으셨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지어가고 계십니다. 처음 것들이 죽어나가는 그 자리마다, 하나님의 새 성전이 한 층씩 올라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집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지어주시는 분 앞에서 우리의 도면을 내려놓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