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 하심이니라."(로마서 2:6~11)
2005년 봄, 세계 미술계에 이례적인 사건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일본의 한 전자회사가 소장하고 있던 반 고흐와 피카소의 작품을 경매에 내놓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세계 최대 경매 회사인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즉각 움직였습니다. 양측은 저마다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어느 쪽도 우위를 가릴 수 없는 막상막하의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골머리를 앓던 일본 전자회사의 임원은 두 대표를 한자리에 불러 세우고 선언했습니다.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경매 회사들이 수백억 원짜리 명화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한 것입니다. 결과는 크리스티의 승리였습니다. 크리스티가 가위를 냈고 소더비가 보를 냈습니다. 이 황당하면서도 유쾌한 사건이 영국의 과학 대중지 『뉴 사이언티스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사의 초점이 경매 결과가 아니라 가위바위보의 심리학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위·바위·보 가운데 바위를 가장 강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가 바위를 낼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 보를 먼저 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 실험에서도 첫 번째 게임에서 보를 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따라서 첫 게임의 필승 전략은 가위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봅시다. 정말로 바위가 가장 강할까요? 보자기가 바위를 감싸면 바위가 지는 것 아닙니까? 논리적으로 따지면 바위보다 보자기가 더 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마음속에는 보자기가 아니라 바위가 가장 강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인간은 깨고 부수어서 승리하는 방식에는 익숙하지만, 감싸서 이기는 방식에는 좀처럼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싸 안는 것은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곧 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은 늘 그렇게 작동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깨부수는 것이 승리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법칙은 다릅니다. 하늘의 승리는 언제나 감싸 안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8절에서 놀랍도록 선언을 합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의 노와 분을 부릅니다. 왜그럴까요? 그리고 당을 짓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창세기 11장으로 가야 합니다. 거기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설 현장이 등장합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바벨탑입니다. 인간들이 연합하여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닿겠다는 것, 그리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경고하는 '당 짓기'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 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명한 '행복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최고의 명강사였고,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수많은 청중을 사로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행복을 가르치던 사람이 가장 불행하게 삶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의 본질적 한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오늘날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면 비슷한 책들이 넘쳐납니다. 긍정의 힘, 마음챙김, 회복탄력성, 자기효능감… 제목은 다양하지만 핵심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신 안에 답이 있습니다." 어떤 저자는 심리학 연구 결과를 곁들여, 어떤 이는 뇌과학을 앞세워, 또 어떤 이는 동양 철학을 빌려 같은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 주는 강사는 회당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의 강사료를 받으며 종횡무진 활동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행복해지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교회가 실제로 크게 성장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간들이 그만큼 행복에 굶주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시도를 향해 놀랍도록 냉정한 시선을 던집니다. 그것은 기특한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3~15) 바벨론 왕을 향한 이 선언은, 기름 부으심을 받은 천사장 루시퍼를 향한 선언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를 향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바벨론 왕은 항상 '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노아의 홍수 사건 바로 뒤에 이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직접 목격하고도, 인간들이 생각해낸 것이 고작 "탑을 더 높이 쌓아 홍수를 피하자"는 방법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인간의 토목 공사로 맞선 것입니다. 이것은 용기가 아니라 패역입니다. 심판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무례한 도전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때로 마약을 합니다. 마약을 하는 순간에는 실제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그 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것이 진짜 행복입니까? 그것은 진짜 행복을 파괴하는 악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쌓아 올리는 행복의 탑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행복처럼 보이지만, 진짜 행복을 가리는 정교한 가짜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으로 존재가 채워질 때에만 비로소 성취될 수 있습니다.
바벨탑 건설의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이름을 내고"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사업을 일으켜 지역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지역 사회에 기부도 하고,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이 세워졌고,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자신을 지켜주는 성벽이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이 나쁜 일입니까?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구조 전체를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쌓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입니까, 당신 자신의 이름입니까? 잠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ㅐ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이 "견고한 망대"는 히브리어로 '견고한 성'입니다. 바벨탑과 정확히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이름의 바벨탑을 견고한 성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만이 진짜 견고한 성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바벨론의 최후 모습이 등장합니다.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의 몸 가득 이름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은 직함들, 업적들, 훈장들, 학위들, 인맥들… 그것이 바벨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의 이마에는 다른 이름이 새겨집니다.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창 12:2) 하신 약속은 사실 이런 뜻이었습니다. "네 이름을 빼앗아 버리고 창대한 이름으로 바꿔 주겠다." 성도의 회복은 이름을 얻는 방향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지향됩니다.
다니엘서에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등장합니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제국 바벨론의 왕입니다. 그는 어느 날 궁전 지붕을 거닐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그는 궁전에서 쫓겨나 들판으로 나가 소처럼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7년이었습니다. 세계 최강국의 왕이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단 4:32) 이 7년은 형벌이기 이전에 가르침이었습니다. "네가 뭘 지었다고?" 를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자기 이름과 명성을 삭제당하고 부정당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전도서는 같은 진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전 3:18) 인생의 목적이 "내가 짐승입니다"라는 고백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7년이 지난 후, 느부갓네살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34) 바벨론의 왕이 드디어 진짜 왕을 발견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바벨탑이 세워진 장소를 "시날 평지"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어로 '비크아'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다시 등장하는 곳이 에스겔서 37장입니다. 마른 뼈들이 가득한 그 골짜기입니다.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골짜기에 뼈들이 쌓여 있습니다. 바싹 마른 뼈들입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에스겔이 그것을 사방으로 둘러보는데, 아주 많고 아주 말랐습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런데 바로 그 '비크아', 그 마른 뼈의 골짜기가 바벨탑이 세워진 장소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인간들이 하늘에 닿겠다고 열심히 탑을 쌓고 있는 그곳이 사실은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라는 것입니다. 죽은 뼈들이 스스로 하늘에 도달하겠다고 벽돌을 굽고 역청을 바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처절한 코미디입니까?
하나님은 그 마른 뼈들을 살려내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들의 당 짓기를 파헤치셔야 합니다. 창세기 1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당 짓기를 분쇄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에스겔 37장에서 생기, 곧 성령이 마른 뼈 위를 덮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른 뼈들이 살아나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마가 다락방도 똑같은 순서로 진행됩니다. 죽은 뼈들처럼 모여 있던 제자들 위에 불의 혀 같은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들의 언어가 혼잡해졌습니다. 바벨탑에서처럼 흩어짐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흩어짐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인간들의 당 짓기가 부서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이야기가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진 곳이 창세기 30장입니다. 때는 맥추절, 즉 오순절이었습니다.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가져왔습니다. 임신을 촉진한다고 알려진 식물이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는 라헬이었지만, 라헬은 오랫동안 태가 닫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라헬은 그 합환채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레아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레아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밤 내 남편이 나와 동침하리라." 신랑을 주고 합환채를 산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모형입니다. 신랑 예수가 율법의 손에 넘겨지고, 그 자리에 성령이 오시는 그림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에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레아에게 신랑을 빼앗기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라헬의 손에 합환채가 쥐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자리에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오순절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라헬은 합환채로 요셉을 낳았습니다. 요셉은 성령으로 태어난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 요셉에게만 아버지 야곱이 채색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 예수의 피로 씻은 세마포 옷, 곧 은혜의 옷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식을 잘 낳던 형들, 곧 율법 아래의 육적 이스라엘은 그 채색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은혜를 값없이 여기는 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같은 이야기를 명시적으로 설명합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인간의 가능성과 열심을 의지하는 자들이 오직 은혜로 난 자들을 핍박합니다. 자신들이 열심히 쌓아 올린 마른 뼈의 덮개가 벗겨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에는 아마겟돈이라는 전쟁터가 등장합니다. 마귀의 세력들이 전 세계의 왕들을 한곳으로 모읍니다. 흩어짐을 면하겠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당 짓기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뜬금없어 보이는 명령이 선포됩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전쟁터에 모인 군대들을 향해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덮으심의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들끼리 아무리 모여 세력을 구축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반드시 부수어 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겟돈, 히브리어 '할마게돌'은 므깃도 산입니다. 므깃도는 "군대를 소집하다"는 뜻의 '가다드'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12장에서 그 므깃도 골짜기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슥 12:10)
하나님께서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내가 예수를 죽인 자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자기 부인의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 므깃도 "골짜기"라는 단어가 바벨탑이 세워진 시날 "평지", 에스겔의 마른 뼈 "골짜기"와 모두 같은 히브리어 '비크아'입니다. 인간들이 당을 짓는 바로 그 현장에 성령이 침투하셔서, 당 짓기를 분쇄하시고 은혜로 덮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미래의 어느 날 한 번만 벌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고 있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그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승리하실수록, 우리의 이름은 점점 빼앗김을 당합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그 성령의 정체를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애 4:20) 콧김, 곧 생기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공로를 붙드는 것뿐입니다.
말라기서에 에돔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말 1:4) 하나님이 부수셨는데 또 쌓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즉각 응답하십니다.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에돔은 계속 쌓고, 하나님은 계속 허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 안에 에돔이 있습니다. 무너져도 또 쌓으려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수셔도 더 견고하게, 더 높이 다시 쌓으려 합니다. 그것이 바벨탑이고, 당 짓기이고, 인간의 죄성입니다. 자신의 선행 체계와 지식 체계와 인맥과 업적을 동원하여 자존심을 세우고 존재성을 지키려는 모든 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계속 부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보자기로 덮으셔서 살려내십니다.
빌립보서는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7~9) 새 이름은 죽음 이후에 주어집니다. 자기를 비운 자리에 찾아옵니다.
탕자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자기 이름으로 살아보려다 돼지우리에서 자신이 짐승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반면에 아버지 곁에서 착한 일만 하며 자신의 의로움으로 아버지까지 탄핵했던 장자는 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지키려 한 자가 아버지의 잔치 밖에 서 있었습니다.
보자기는 바위를 이깁니다. 감싸 안음이 깨부숨을 이깁니다. 은혜가 율법을 이깁니다. 부수어지는 당신의 인생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름을 빼앗기는 당신의 인생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보자기가 당신을 덮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위이고 싶은 우리에게 은혜의 보자기가 덮이는 것, 그리고 그 보자기 아래에서 부수어지고 다시 살아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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