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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은혜로 돌아서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5.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로마서 2:28~29)

요즘 전 세계 TV를 장악한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순위를 매기는 것입니다. 노래든, 댄스든, 개그든, 사람들은 그 무대에서 "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느끼는 이들은 화면 앞에 앉아 대리만족을 누립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순위를 매기고 평가를 받으려 합니다. 교인 수를 늘리고, 건물을 넓히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에 열을 올립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발전도, 자아실현도, 자기성숙도 기독교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자기부인과 자아삭제라는 다소 불편한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앙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여전히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증명하려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 마지막 단락에서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이 문장이 오늘 본문의 핵심 주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민족적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라면,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 "자칭 유대인"을 "사단의 회"(계 2:9)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율법과 행위와 열심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구축하고 그것으로 남보다 우월한 자리에 서려는 모든 인본주의적 충동이 바로 이 "자칭 유대인"의 정체입니다. 스스로는 당당히 "나는 교회다"라고 외치는데 하나님은 "너는 사단의 회다"라고 하시는 그 간극이 우리 안에도 혼재합니다.

그들의 자기평가는 꽤 근사합니다. 율법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선악을 가릴 줄 아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경의 길잡이가 될 자격도 있고, 어리석은 이들의 선생이 될 자격도 있다고 확신합니다(18~20절). 자신을 향한 이 자신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모르는 자의 전형적인 얼굴입니다. 바울은 "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지만, 자칭 유대인은 자신의 됨됨이를 스스로 사유하여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바울은 21절부터 이 화려한 자기평가의 이면을 냉혹하게 들춥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21절) 이 말씀을 "말만 하지 말고 실천하라"는 권면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바울은 지금 유대인 개개인의 실제 범죄 이력을 조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훨씬 더 깊은 곳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라 하고(말 3:8),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음란한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 합니다(마 5:28).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모든 삶 자체가 신성모독입니다. 이 잣대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러한 실체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남의 선생이 되겠다고 나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경고했고, 예수님도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마 23:8)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유대인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 한 사람을 얻으면 그를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23:15). 인간의 열심이 만들어 낸 천국을 전하면, 그 천국은 결국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진 세상의 화려함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 평지를 바라보며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했을 때(창 13:10), 그는 애굽의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판단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힘의 땅,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그것이 불에 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인간 중심의 시선이 만들어 낸 천국은 반드시 불에 탑니다. 바울은 이 논지를 마무리하면서 할례라는 의식을 끌어들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28절) 할례와 율법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갈 5:3).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는 것이고,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입니다(갈 5:4). 그렇다면 할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제물을 쪼개게 하시고 그 사이를 당신 홀로 지나가십니다. 히브리어로 제물을 쪼개는 것은 '
바타르', 언약은 '베리트', 복은 '바라크', 이 세 단어는 모두 '자르다, 쪼개다'라는 어근 '바라'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뜻하는 히브리어 '' 역시 '자르다'는 뜻입니다. 이것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쪼개지심을 통해 당신 백성의 생육과 번성을 이루시기로 창세전에 언약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는 "
나의 출생을 위해 하나님이 피를 흘리고 쪼개지셨다"는 은혜의 선언을 몸에 새기는 의식이었습니다. 인간의 공로를 쌓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더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이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고 하실 때(막 9:43), 그 '찍어 버리다'는 헬라어 '아포콥토'는 할례를 의미하는 제사 용어입니다. 원래 잘려야 할 것은 죄인인 우리의 손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례가 예수님께 행해졌습니다. 골고다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3) 진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식 능력이 잘려나간 아브라함처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후손이 생긴다는 것을 알기에, 오직 예수만 자랑하게 됩니다.

에스겔서는 이 진리를 다른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36장에서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당신 백성의 마음에 새 언약을 새기십니다. "
굳은 마음을 제하고", 이 '제하다'가 히브리어로 '베어내다, 할례하다'입니다. 그리고 37장, 마른 뼈 환상이 이어집니다. 뼈들이 스스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죽어 있었고, 생기가 외부에서 와서 그들을 살렸습니다. 그들의 첫 자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겔 37:11) 그것이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 무력함의 고백 위에 하나님의 생기가 임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8장의 곡과 마곡의 전쟁도 같은 맥락입니다. 곡은
'짜폰', 북방에서 옵니다. 그런데 그 '짜폰'은 이사야 14장에서 마귀가 앉으려 했던 하나님의 자리이며(사 14:13), 시편 48편에서는 시온산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시 48:2). 곡은 인간의 마음속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백성을 칩니다. 그 공격에 성도는 집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는 부르짖음이 터져 나옵니다. 그것이 심령의 가난이며 애통이며, 십자가를 붙드는 손입니다.

아마겟돈도 마찬가지입니다. '
므깃도의 산', 요시아 왕이 애굽에게 맞아 죽은 그 산에서 이스라엘 전체가, 교회가, 나의 주체성과 자율성과 존재성이 죽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경로입니다. 새 언약의 구원은 인간이 이겨내고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하나님 자리에 앉고 싶은 욕망"이 폭로되고, 나의 불가능함이 드러나고, 그 자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붙들게 되는 그 자기부인의 경험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선생의 자리에 앉겠습니까?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사랑스러운 이유는 도와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도 어눌하고 걸음도 불안하고 물가에 내놓으면 금방 빠질 것 같아서, 부모는 늘 그 뒤를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예쁩니다. 반대로, 아기가 세계 경제를 논하고 신학 토론을 시작하면 부모의 마음은 섬뜩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를 언약의 기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선생이 되려 하고 훈도가 되려 하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할례로, 우리 대신 쪼개지신 그 은혜로 구원을 얻은 면목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 은혜 앞에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고, 더 많이 죽읍시다. 아기의 의존성을 배우십시오. 그래야 우리 아버지께서 기저귀를 갈아주시며 행복해 하시고, 은혜와 긍휼의 젖을 물려주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갈라디아서 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