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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부어진 저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24.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로마서 3:1~8)

1990년대 초,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이던 시절의 일입니다. 한 종군기자가 사라예보 외곽의 무너진 교회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포탄에 반쯤 허물어진 첨탑 아래, 그을린 벽면에 누군가 붉은 페인트로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셨다면, 이미 오래전에 떠나셨다." 기자는 그 문장을 사진에 담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종족 간의 종교적 갈등이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은 우물물을 마시며 자란 이웃들을 학살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손으로 총을 들었고, 찬송가를 부르던 입술로 증오를 쏟아냈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맨 얼굴입니다.

잠시 이 단어들을 나란히 놓아보십시오. 십자군 전쟁, 911 테러, 마녀사냥, 보스니아 인종청소, 자살 폭파범,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 종족 학살, 이 모든 것의 교집합은 무엇입니까? 종교입니다. 인간이 신앙하는 종교가 없었다면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류가 만들어낸 선행 체계 중 가장 위대하다는 종교가, 왜 오히려 분열과 살인과 전쟁을 끝없이 생산해내는 것입니까?

이 세상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인간다움의 회복입니다. 각 사람이 착해지고 현명해져서,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고, 인간이 꿈꾸는 행복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종교의 목적지입니다. 불교도, 이슬람도, 유교도, 심지어 사탄교까지도 표방하는 방식은 달라도 궁극적으로는 인간 중심의 이상 세계를 꿈꿉니다.

문제는 그 종교 안의 모든 구성원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
'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 가장 착해야 하고, ''가 가장 선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며, ''가 가장 행복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신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하나님이다'를 외치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이 모여 종교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표피적 목적은 아무리 선해 보여도, 그 열매는 필연적으로 분열과 다툼과 전쟁일 수밖에 없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 하고, 다수가 무리 지어 망상에 시달리는 것을 종교라 한다." 물론 도킨스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도 결국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행복을 쟁취하라고 주문하니, 그 역시 같은 망상 안에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가 종교를 향해 던진 이 한 문장만큼은 날카롭습니다.

이데올로기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불과 백여 년 만에 1억 명을 학살했고, 자본주의는 힘없는 자들을 보이지 않게 소멸시키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짓밟습니다. 형태가 다를 뿐, 모두 '
'를 중심으로 대척점에 있는 이들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구조입니다. 역사가 언제나 전쟁 중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오도하여 이와 같은 종교로 전락해버리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그것이 로마서 3장 본문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장훈 감독의 영화 〈고지전〉은 1953년,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협상이 타결되는 순간 점령하고 있는 고지가 자국의 영토가 되기 때문에, 남과 북의 군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를 주고받으며 피가 튀기는 전투를 반복했습니다. 고지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다 보니 양측은 보급품을 참호 안에 묻어두고 후퇴했습니다. 인민군은 북쪽의 정종을, 국군은 화랑담배를, 그리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들은 싸우고 있었습니다. 정종 병을 묻어두고 간 따뜻한 마음의 형제가, 자신이 방아쇠를 당겨 쓰러뜨린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영화는 인민군 장교의 훈시로 시작됩니다. 국군 포로들을 풀어주며 그가 말합니다.
"너희가 지는 이유가 뭔지 아나? 왜 싸우는지를 모르고 싸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적이 있다." 관객은 그 순간 묻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싸우는가? 감독은 그 대답을 영화 내내 유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 인민군 장교와 국군 장교가 죽음을 앞두고 다시 마주섭니다. 국군 장교가 묻습니다. "그동안 정말 물어보고 싶었다. 넌 진짜 우리가 왜 싸우는지 알았느냐?" 숨을 거두며 인민군 장교가 대답합니다. "처음엔 아는 것 같았는데, 하도 길게 싸우다 보니 나도 잊어버렸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실상입니다.

'
'가 주인이 되어 ''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종교를 만들고, 그 종교를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구조입니다. 처음엔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싸우고 또 싸우다 보면 결국 왜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리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각자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빚어내는 역사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 영화에서 한 병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인 사람을 차마 셀 수가 없다. 나는 죽으면 당장 지옥에 갈 거야.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이렇게 죄를 짓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당장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실까? 알았다.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 지옥에 그냥 놔두시는 거야."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실체를 올바로 인식하고, 거기에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큰 선물인지를 감동스럽게 인정하는 자들을 성도라 합니다.

그래서 '
다 이루었다'로 완결되는 십자가 사역을 설교하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몇 해 전, 어느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몇 주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완전성을 집중적으로 설교했더니, 한 집사님이 찾아와 항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왜 요즘 설교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들립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좀 가르쳐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집사님은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기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살펴보니, 가정에서는 배우자를 하대하고, 직장에서는 동료를 무시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선행으로는 열심이었지만, 복음으로는 불편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오늘 본문이 다루는 문제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 후에 '이제 나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구나'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는 복음에 정반대되는 설교를 한 것이다. 무율법주의라는 오해를 받지 않는다면, 그가 진실로 복음을 설교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싱클레어 퍼거슨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되지 않은 자들의 그럴듯한 경건한 종교 행위는 악마의 유희에 불과하다. 성도의 올바른 신앙 행위는 은혜를 아는 지식에 의해 비워진 자아의 빈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이 종교와 기독교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종교적 열심은 은혜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인간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열심은 은혜가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을 기억하십시오.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의 형상이 벗겨진 인간은 자신의 벌거벗음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기원입니다. 명예의 옷, 재물의 옷, 선한 평판의 옷, 종교적 열심의 옷, 인간들은 오늘도 그 옷들로 자신의 벌거벗음을 가리려 애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옷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선행, 구제, 열심,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자찬하던 그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벌거벗음이었습니다.

구속사의 전체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찾아가셔서 그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벗기시고, 무죄한 어린양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은혜의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것입니다. 역사는 결국 이 두 옷 사이의 전쟁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리스도라는 옷이 성도가 끝까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옷입니다.

이제 본문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로마서 3장은 헬라어 원어로 '
티 운'이라는 의문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앞선 2장의 논증을 이어받는다는 신호입니다. 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자신들의 선민의식 근거로 삼았는데,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십자가를 붙들게 하는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이지, 인간들이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는 도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율법주의자들이 반드시 제기할 반론을 바울은 선제적으로 스스로 묻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롬 3:1) 그리고 즉시 대답합니다. "유익이 참 많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다." 여기서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로고스'가 아닙니다. 여기 쓰인 단어는 '로기온'입니다. 신약 전체에서 서너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이 단어는, 고대 세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신의 계시를 몸으로 받아 그것을 몸과 입으로 구현해내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로기온'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들은 마치 빙의된 사람처럼, 자신의 뜻과 의지가 부인당한 채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소리쳐라" 하고 외칠 때, 그 입은 선지자의 것이었지만 그 말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계시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는 것이 '로기온'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
로기온'을 맡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의 됨됨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것을 계시했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이며, 얼마나 철저히 은혜가 필요한 자들인가?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받은 율법과 할례로 자신들의 위상을 챙기면서, 은혜를 전하는 선지자들을 때려죽이면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거대한 계시였습니다. 인간이 혼자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기필코 구원해내신다는 것,
그것이 말씀을 맡은 유익입니다. 구원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되는 것, 그 자체가 유익입니다.

그러자 두 번째 반론이 제기됩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롬 3:3) 유대인들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때려죽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신 것이 실패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
미쁘심'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뜻은 '하나님의 믿음', 즉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입니다. "아버지는 널 믿는다"고 할 때, 그 아버지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어주든 믿어주지 않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절대 실패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조차 하나님의 그 미쁘심 안에 있는 계획이었지, 그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4절에서 선언합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여기 '거짓되되'로 번역된 '프슈스테스'는 단순히 거짓말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리석고 무지하여 자기 마음에 옳다 생각하는 것을 진리로 믿고 행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프슈스테스'들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이십니다.

바울은 여기서 다윗의 시편 51편 4절을 인용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이 시편이 언제 쓰였는지 아십니까?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교살한 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다가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저주를 전해 들은 그 순간입니다. 다윗은 아마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하나님 앞에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가. 이 정도 흠은 눈감아 주실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그 앞에 다윗은 무너집니다. "하나님만이 의로우십니다. 내 이성과 논리로 하나님을 재단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무식한 짓인지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약간 다른 강조점을 둡니다. 시편 51편이
'하나님의 말씀과 판단은 다 의롭다'는 다윗의 고백에 초점을 둔다면, 바울은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의로우심이 드러나고, 판단받으실 때마다 항상 이기신다'에 초점을 둡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인용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용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오직 어린양의 보혈만을 의지하게 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죄를 사용하여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이기심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미리 막아주시지 않고, 죄를 짓게 해놓고서야 은혜를 덮으시는가?" 그런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맞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반론이 제기됩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심판할 수 있는가?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해졌다면, 어찌 나를 죄인처럼 심판하는가?"(롬 3:5, 7) 바울은 이것이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의 억지임을 괄호로 명시합니다. 그러나 이 반론 뒤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롬 3:8)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했더니, 어떤 이들이 그것을 방종의 면허로 사용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방종의 책임을 바울에게 떠넘겼습니다. "저 사람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해도 된다고 가르쳤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도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들은 자와, 그것을 방종의 핑계로 삼은 자는 어떻게 구별됩니까? 담배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오래전부터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안달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서 체면이 있으니 꾹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목사님이 은혜를 강조하는 설교를 하자, 그것을 자신의 욕망을 해방시킬 기회로 삼아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쳐서 내가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이것은 복음의 감동이 아닙니다.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자기 변명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체험한 자는 다릅니다. 논리적으로는 '
이제 막 살아도 되겠구나'가 가능하지만, 삶 속에서는 그게 안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에 의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성령이 이끄는 삶과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갈라지는 분기점입니다.

성령이 살게 하는 이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성령이 이끄는 삶을 삽니다. 억지로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만들어 입던 자들은 핑계가 생기는 순간 즉시 방종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엉뚱한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그들이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기도원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내가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로 하나님의 작정이 바뀌지 않을 텐데.'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 묵시 속에 완료된 그 일을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비로소 이해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에 기도가 소용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은혜의 방편인 것입니다.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내가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 맺히는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확보하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무력함을 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착한 일만이 아닙니다. 모든 일입니다. 예수의 심장으로 이웃을 섬기는 날도, 이기적이어서 스스로 부끄러운 날도, 모두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우리도 '로기온'을 맡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됨됨이와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 삶 전체를 당신의 계시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말기 암 환자들,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 이들, 무료 급식소 앞에 줄 선 노숙자들, 타국 만리에서 피땀 흘리는 외국인 노동자들, 오갈 데 없는 고아들, 그들을 만나면 이 기도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비우게 하소서." 프란체스코의 기도이지만, 그 이전에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이제 우리 안에서도 진심으로 터져 나와야 합니다. 그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말씀으로, 물질로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들을 만나게 하시는 것은, 그들보다 훨씬 더 불쌍한 지경에 처해 있었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로기온'입니다.

어떤 권사님을 있습니다. 말기 암 진단을 받으신 분입니다. 집안도 많이 어려워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얼굴에는 비참함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씩씩하고, 당당하고, 기쁜 모습이었습니다. 그 권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평생 기다리던 신랑과의 혼인 잔치를 앞둔 신부 같습니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가까이에서 목도해보신 분이라면 압니다. 죽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 앞에서 혼인 잔치를 앞둔 신부의 얼굴을 가진다는 것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서 가능한 것이겠습니까?

그 권사님이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어떤 기도를 부탁하실지 기다렸습니다. 고통을 없애달라는 기도?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수시로 찾아오는 고통이 너무 커서,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혹시나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대하며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끝까지 잘 참아볼게요"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이 힘 주시지 않으면 고통도 이기지 못해 하나님을 원망할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진짜 자기 부인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아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가 부인되어진 사람만이 죽음 앞에서 신부의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전부 인간의 무력함과 범죄함을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낱낱이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 이런 고민이 있다면,
"나도 섬기는 삶을 살고 싶다. 나도 평화의 도구가 되고 싶다. 나도 마지막 순간에 그 권사님처럼 죽고 싶다." 그 고민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고민을 두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은,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