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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하나님의 캔버스 - 말씀을 맡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6.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로마서 3:1~2)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이 걸려 있습니다. 형형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 그림 앞에 서면, 많은 관람객들이 발걸음을 멈춥니다. 그림 속 인물이 살아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고흐는 생전에 자화상을 30점 이상 그렸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혹은 거울 없이도, 자신의 내면을 캔버스에 쏟아냈습니다. 평론가들은 고흐의 자화상에는 외형의 묘사가 아니라 그의 실존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화가는 대상의 외형을 옮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캔버스에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위대한 초상화는 사진보다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역사와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캔버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와 역사와 인간의 삶이라는 광대한 화폭 위에 단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데, 그 그림의 제목은 '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그림을 구성하는 붓 터치이며, 모든 인생은 그 그림의 일부를 담은 캔버스 조각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바울의 선언은 이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입니다.

창세기 2장은 짧지만 놀라운 선언으로 끝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단순히 "하나님도 쉬셨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목적이 완성된 상태, 더 이상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로해서 취하는 휴식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의도한 대로 완성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골로새서는 그 창조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안식과 골로새서의 예수를 연결하면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안식, 곧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완성된다. 그 완성을 설명하기 위해 천지만물이 창조된 것이다." 복음서가 이것을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며 공생애 내내 새 창조의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 유월절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위에서 선언하신 말씀이 창세기 2장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다 이루었다."

창세기에서 엿새 만에 천지 창조가 완성되었듯, 복음서에서 여섯째 날 예수의 죽음으로 새 창조, 곧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 개념에는 결정적인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
일하지 않음'입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까지 명합니다. 이 가혹해 보이는 규정은 사실 하나의 복음적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건설되거나 유지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는 것은 "
구원은 네 힘으로 얻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단호한 선포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원망하자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독특한 규칙이 붙습니다. 엿새 동안은 매일 그날 분량만 거두고, 일곱째 날 안식일에는 나가서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만나를 거두는 행위를 가리켜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만나는 율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라는 명령은 무슨 뜻입니까? 율법을 지켜서 안식을 획득하려는 모든 시도를 멈추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안식일 아침에 일어나 이렇게 생각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
오늘은 안식일이지만, 내가 조금 더 부지런히 만나를 모아두면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내 열심을 기뻐하실 것이다.' 그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만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율법을 어긴 자가 됩니다. 역설적으로 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하려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구원을 확보하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만나는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내려온 것입니다. 안식으로 가는 길에 만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를 열심히 쌓아야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어지는 만나를 은혜로 받아먹으며 걸어갈 때, 그 길 끝에 안식이 있습니다. 만나는 안식으로 가는 징검다리이되, 인간이 쌓아서 건너는 돌다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놓아주시는 은혜의 다리인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아직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타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전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백성을 살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로 인해 이스라엘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은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었습니다. 중보자의 목숨을 건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두 번째 돌 판이 내려오고,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걸어 마침내 약속의 땅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 순간, 중보자 모세가 안식의 땅 바로 앞에서 죽습니다.

왜 모세는 거기에서 죽어야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은 반드시 알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중보자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모세의 죽음은 그 사실을 역사 속에 새긴 하나님의 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곧 예수라는 이름의 인물이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너 이스라엘을 이끌고 들어갑니다. 모세가 모형했던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그림이, 수천 년 전 가나안 정복 이야기 속에 이미 완전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
이것을 지켜서 나에게 올라오라"는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설명하는 것이었고, 모세는 예수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최종 목적지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묻습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그리고 스스로 답합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그런데 이것은 이상한 대답입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역사 내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을 맡은 것이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실수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유익은 우리가 생각하는 유익과 다릅니다.

여기서 '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온'은 단순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와 인생이라는 캔버스에 그려내시는 내용 자체를 가리킵니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캔버스로 사용하셔서 당신의 언약을 그려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 유익은 말씀을 맡긴 이의 유익이 아니라 말씀을 맡은 자의 유익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행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시고, 그 폭로된 실체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혀 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맡는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주어진 지침서가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깊이 죄인인지를 드러내고, 그 깊이만큼 더 크게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게 하는 수술용 메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날 선 검인 것입니다.

독일의 역사철학자들은 역사를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의 역사와, 서술자의 관점과 해석이 담긴 역사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신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인간이 기록한 역사가 과연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의 역사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에게 객관이란, 주관을 좀 더 세련되게 포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 읽기도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성경은 '
예수 그리스도'라는 팩트를 중심으로 기록된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서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도덕과 윤리와 이성을 덧씌워 서술자의 관점과 해석이 담긴 역사로 읽어버립니다. 그 결과 성경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자기계발서가 되고, 설교는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처세술 강연이 됩니다.

다윗이 왜 용감했는지 배우는 것, 다니엘이 어떻게 신앙을 지켰는지 따라 하는 것, 바울처럼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것을 결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설교가 끝난다면, 그 설교는 아직 예수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왜 그토록 연약하고 실패하는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이 흔들리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풀무불 속에서도 네 번째 인물로 함께 걸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
예수'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장애를 가진 딸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딸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지만,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면서, 왜 죽어있는 하나님처럼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가만히 앉아 묵상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살아계셔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평소의 자기 삶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아왔다는 것을, 하나님이 살아계셔야 하는 순간은 오직 자신이 무언가 필요한 순간뿐이었다는 것을, 그것 이외의 시간에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자기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호출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민낯입니다. 광야에서 애굽의 부추와 마늘을 그리워하던 이스라엘의 민낯이며,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가던 이스라엘의 민낯입니다. 말씀을 맡고도, 율법을 받고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더 눈이 먼 인간의 민낯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민낯이 드러날 때, 말씀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술용 메스가 환부를 도려낼 때, 환자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회복을 위한 고통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민낯을 드러낼 때, 우리는 통곡합니다. "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언제든지 마귀의 세간일 수밖에 없는 저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그 통곡이 터져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식의 문 앞에 서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이 쉼이 있는 사람은 재물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자녀가 속을 썩여도, 남들의 평가가 좋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만을 붙들며 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안식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세상의 종말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하늘과 땅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낡아지고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완성하면 모델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모델 하우스는 입주자가 들어오면 철거됩니다. 이 역사와 우주와 인생이라는 캔버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완성되면 그 역할을 다하고 사라집니다. 그때 오롯이 예수만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세워집니다. 그것이 진정한 안식의 나라인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붓을 들고 계십니다. 당신의 인생이라는 캔버스 위에, 당신의 역사 위에, 때로는 어두운 색깔을 쓰시기도 하고, 때로는 뜻밖의 방향으로 붓을 움직이시기도 합니다. 그 모든 붓 터치가 모여 결국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십자가의 필연성을 담은 그림, 그 그림 안에 있는 것이 말씀을 맡은 자의 유익입니다. 그 그림 안에 있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 그림 안에서 자신의 처음 자리를 보고, 그 자리를 덮으시는 은혜를 붙드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인생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 분이 그리고 계신 그림의 제목을 읽어내십시오. 그것이 '
예수'임을 발견하는 순간, 안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