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1~24)
1980년대 초, 대한민국의 어느 골목 어귀에서 아이들은 만화책 한 권을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었습니다. 외팔이, 난쟁이, 혼혈아, 둔한 거인, 세상이 버린 자들이 모여 야구 배트를 잡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들은 그 불구의 선수들에게 열광했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는 통쾌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만화를 다시 떠올릴 때마다 조금 다른 장면을 보게 됩니다. 주인공 오혜성이 눈을 잃어가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엄지를 구하기 위해, 마동탁이 날린 타구를 눈으로 받아내는 그 장면입니다. 진짜 장님은 엄지였습니다. 마동탁이라는 악인을 사랑하여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녀는 이미 눈이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까치가 눈이 멀었습니다. 장님이 장님을 보기 위해 스스로 장님이 된 것입니다. 그 역설 앞에서 우리는 이것이 사랑의 문법이구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스스로 약한 자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사랑이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자수성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업에 성공했고, 자녀들을 잘 키웠으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팔순이 넘어 치매가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을 잊었습니다. 열쇠를 어디 두었는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그러다가 점점 더 많은 것이 사라졌습니다. 며느리 얼굴을 못 알아보았고, 손자 이름을 잊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하게 되었고, 기저귀를 차야 했습니다.
그 노인의 아들이 매일 병원을 찾았습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아버지 곁에 앉아, 숟가락으로 밥을 떠 입에 넣어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당신 누구야?"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날은 그 손을 뿌리쳤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매일 왔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알아보지도 못하시는데, 왜 매일 오십니까?"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알아보아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버지를 알아보기 때문에 오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로마서 3장 24절의 한 단어가 떠오를 것입니다. 구속은 포로로 잡혀 있는 자를 몸값을 치르고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매일 병원으로 향하는 것은 아버지가 무언가를 자격으로 갖추고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알아보아서도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먼저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속은 항상 그런 방향으로 흐릅니다. 강한 자에서 약한 자로, 아는 자에서 모르는 자로, 살아 있는 자에서 죽어 있는 자에게로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3장 20절까지, 참으로 길고 냉혹한 고발장을 써 내려갑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을 가진 자든 양심을 가진 자든,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릅니다. 한마디로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이라는 것입니다.
읽다 보면 숨이 막힙니다. 이 고발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가는 나, 말씀을 알면서도 욕심을 따라 결정을 내리는 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두려운 일 앞에서는 하나님을 제일 먼저 잊어버리는 나, 바울의 고발은 나에게로 곧장 날아옵니다.
그런데 3장 21절에서 바울은 갑자기 문체를 바꿉니다. 헬라어로 "누니 데", 그러나 이제는, 이 두 단어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다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원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르쳐 주는 선생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거울처럼, 자신의 얼굴에 묻은 때를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거울을 치장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자기 얼굴의 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켜 자신을 빛나 보이게 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의 원형이신 예수를 직접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율법이 가리키고 있던 그 분이 몸소 오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 헛간 한 켠에 낡은 지게가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쓰시던 것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지게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 그는 그 지게를 지고 논두렁을 걸었습니다.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빈 지게였는데도 그는 비틀거렸습니다. "이걸 할아버지는 어떻게 지셨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지게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을 짊어진 사람의 삶이 거기 배어 있습니다.
율법도 그렇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열 가지 계명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 자기 힘으로는 단 한 조항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그 무력함이 핵심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지게를 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율법을 지고 서서 "나는 이 무거운 것을 지고 있다"며 자랑했던 것입니다.
25절에서 '화목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은 사실 법궤 뚜껑, 곧 시은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성소 안에 있던 그 황금 뚜껑,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그 위에 뿌리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법궤 안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만나 항아리, 십계명 돌판,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인간의 죄를 담아두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받으면서도 이집트의 마늘과 부추를 그리워했습니다. 십계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명예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는 기적을 보면서도 인간적 가능성을 논했습니다. 그 모든 죄가 법궤 안에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그 법궤 뚜껑 앞에 예수가 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만을 보십니다. 인간의 죄 목록이 담긴 법궤 위에 예수의 피가 뿌려지고, 거기에서만 속죄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인간의 죄에서 예수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구조입니다.
어떤 청년이 큰 빚을 지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었고, 법적으로 감당해야 할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판결 전날, 그 청년의 아버지가 조용히 법원을 찾아와 아들 대신 전 재산을 처분해 빚을 갚았습니다. 재판 당일 판사가 서류를 확인하더니 말했습니다. "채무가 변제되었습니다. 피고인은 석방입니다." 청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법정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먼저 움직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속이란 그런 것입니다. 몸값을 치른 자가 따로 있고, 풀려나는 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24절에서 말하는 "값없이"가 바로 그 뜻입니다. 청년에게 값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이미 그 값을 다 치렀다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의 백성을 향해 발휘하시는 믿음, 기필코 언약을 성취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은 그의 믿음이 탁월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팔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먼저 믿음으로 이끄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장면의 히브리어 동사는 와우 계속법으로, 지속적인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이후에도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습니다. 그렇다면 지속된 그 믿음은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을 끊임없이 붙잡고 따라오시는 하나님의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어 '하솨브', 곧 '여기시고'라는 단어는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에도 판정권자가 은혜로 그렇다고 선언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로움을 선물한 것입니다.
둘째는 성도의 믿음입니다. 영어 'believe'는 고어 'be loef'에서 왔는데, '친근히 하다'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beloved', 곧 '가장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라틴어 'credo', '나는 믿는다'는 말의 속뜻은 '나의 심장을 드린다'입니다. 믿음이란 지식의 동의가 아니라, 심장을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관한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수긍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심장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노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젊은 시절,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작은 시골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성도가 열다섯 명이었습니다. 설교를 잘하고 싶었고, 목회를 잘하고 싶었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했고, 심방을 다녔고, 성경공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일기장을 펼치다가 한 문장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나는 오늘 또 내 이름을 위해 설교했다." 그는 그 밤을 뜬눈으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심장은 자기 자신을 향해 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이후 그 문장을 서재 벽에 붙여두었다고 했습니다. 설교 전날마다 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누구를 위해 강단에 서는가."
그것이 자기부인의 시작이었습니다. 옛 자아가 죽는 현장은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일기장 한 줄, 벽에 붙여둔 문장 하나, 그리고 그것을 매일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그 반복 속에서 '나'만을 위해 뛰던 심장이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수십 번 반복하는 것은 집착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달리 말할 방법이 없어서입니다. 인간 쪽에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았는가, 율법을 지켰는가, 선행을 쌓았는가, 그 모든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3장 내내 논증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믿음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마저도 우리가 생산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장악하고, 그 힘으로 우리 안에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30절이 3장의 결론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출신도, 배경도, 열심의 정도도 묻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쟁은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숫자로 치러집니다. 아브라함의 가솔 318명이 5개국 연합군을 파했고, 기드온의 300 용사가 18만 5천 명을 이겼으며, 다윗의 물맷돌 하나가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하나님은 왜 항상 이렇게 연출하실까요? 전쟁에서 이긴 후에 인간이 자기 공로를 챙길 틈을 주지 않으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해 돌아왔을 때, 멜기세덱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전쟁에서 아브라함을 쏙 빼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이 십일조였습니다. 승리의 전리품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상으로 오십니다. 신부가 지참금을 비워낸 그 자리에, 신랑이 들어옵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향해 나아가는 신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검은 피부를 희게 만들어서가 아닙니다. 너덜너덜한 모습을 계발하고 갈고닦아서가 아닙니다. 예쁜 여자가 되어서도, 현모양처로 성숙해서도 아닙니다. "내 모습 이대로, 나 지은 것 죄뿐이니,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고 고백하면서, 면목 없이, 그러나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외인구단의 멤버들보다 더 불가능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 성숙입니다. 불구를 극복해 멀쩡한 사람이 되어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부의 유일한 지참금은 믿음인 것입니다. 왜 신랑은 믿음만을 요구하실까요?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신랑만 사랑하고 신랑만 자랑하게 하시려고, 신부의 어떤 기여도 받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피로만 신부를 구출하셔서 혼인을 올리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나무는 어떤 나무일까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서 배가 열립니다. 성령의 열매는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열립니다. 우리 옛 사람이 못 박히고 예수의 피만 빛나는 나무, 자기부인과 자기부정의 나무, 그 나무에서 '나'를 드러내려는 마귀의 행사가 잦아들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방향성으로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생에 걸쳐 반복됩니다. 부끄럽고 미성숙한 행동이 튀어나올 때마다, 다시 십자가 앞으로 끌려오는 것입니다. 그 반복 속에서 '나'만을 위해 뛰던 심장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신랑의 가슴을 향해 방향을 틀기 시작합니다. 까치는 눈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엄지를 얻었습니다.
예수는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신부를 얻으셨습니다. 우리는 옛 자아를 잃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얻습니다. 그것이 "그러나 이제는"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3장이 선언하는 대반전입니다. 그것이 율법도 행위도 아닌, 오직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참으로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이 드러날 때,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맞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살아 있을 수 없는 자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주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감사할 뿐이다." 그것이 안식입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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