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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국밥이 아니었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 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21~31)

봄이 오면 어머니들은 부엌으로 향합니다. 된장을 풀고 냉이를 다듬고 달래를 썰어 넣습니다. 온 집 안에 봄 향기가 퍼지고, 상 위에 놓이는 것은 언제나 따뜻한 국 한 그릇입니다. 그 국에 밥을 말아 아이 앞에 내밀며 어머니는 말합니다. "
어서 먹어." 사랑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랑입니다.

동요 작곡가 백창우 선생이 곡을 붙인 동요 '
싫단 말이야'의 가사는 초등학생 조민정이 쓴 동시입니다. "왜 국에다 밥 말았어? 싫단 말이야 싫단 말이야. 이제부턴 나한테 물어보고 국에 말아줘. 꼭 그래야 돼!" 아이의 진심이 절절합니다. 엄마는 사랑으로 내밀었지만, 아이에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묻지 않은 사랑은, 아무리 진심이라 해도 결국 자기 방식의 강요가 됩니다. 사랑이 소통 없이 일방통행이 될 때, 그것은 집착이 되고, 때로는 폭력이 됩니다.

어떤 사람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체해서 속이 뒤집혀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할머니께서 국에 밥을 푸짐하게 말아 내오셨습니다. 먹기 싫다고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억지로 삼키다 결국 화장실에서 다 토해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오는 길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할아버지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
우리 아기가 밥을 너무 적게 먹어서 오늘도 국에 듬뿍 말아서 다 먹게 했어요."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칭찬하셨습니다. "잘 했어, 다음에도 그렇게 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남은 것까지 전부 쏟아냈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심은 내 몸 상태를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그날 내게 폭력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나를 사랑하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 율법은 그 사랑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신명기를 읽어보면 그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네가 건축하지 않은 성읍을 얻게 하고, 네가 채우지 않은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고, 네가 파지 않은 우물을 얻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그때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

율법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징검다리였습니다. 네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그럼에도 너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향해 건너가도록 놓인 돌 하나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스라엘의 제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징검다리를 목적지로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나섰습니다. 국에 밥을 말아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이사야를 통해, 말라기를 통해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너희 절기를 내가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습니다. 계속 국에 밥을 말아 가져왔습니다. 더 정성스럽게, 더 많이, 급기야 하나님께서 그 밥상을 엎어버리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지금도 국에 밥을 말고 있습니다.

TV 프로그램 '
진품명품'에서 한 출연자가 비단 보자기에 조심스럽게 싼 문서를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라며, 판정관이 만지려 하자 혹시 헤질까 봐 막았습니다. 예상 가격을 물으니 수억 원을 적어냈습니다. 그런데 판정관의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조선시대 노비문서로 가격은 십만 원 정도였습니다. 의뢰인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가보인 줄 알았는데, 자기 집안의 노비문서였습니다. 들어올 때 비단 보자기에 곱게 싸들고 왔던 그 문서를, 나갈 때는 신문 말듯 돌돌 말아 아무렇게나 들고 나갔습니다.

내가 한 선행, 내가 낸 헌금, 내가 드린 봉사, 얼마나 소중합니까? 누군가 그것을 부정하면 당장 화가 치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죄의 종으로 살다온 자신의 노비문서일 수 있습니다. 그 행위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의 의로 쌓여 하나님 앞에 내밀 자격이 될 때, 그것은 노비문서가 된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율법을 목숨 걸어 지켰습니다. 도덕과 윤리에 흠 잡힐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
독사의 새끼'라 하셨습니다. 그 행위가 나빠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한 것들을 자기 것으로 끌어당겨, 다른 이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무기로 삼았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마귀의 궤계가 있습니다. 마귀는 더럽게 살라고 유혹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게 만듭니다. 반대로 성령은 우리가 교묘하게 감추어놓은 죄 된 모습을 끄집어내십니다. 불편하고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실제 모습이 드러나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대선지자였습니다. 아모스의 아들이었고, 당대 최고의 영적 권위자였습니다. 그런 이사야가 말씀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뵙는 순간, 입을 가렸습니다.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유대인에게 입은 그 안에 있는 것이 흘러나오는 통로였습니다. 입이 부정하다는 것은 내 안의 모든 것이 부정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한순간에 바뀝니다. 스랍이 제단의 핀 숯을 집어 그 입술에 대었습니다. "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가 노력해서 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즉각적으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산상수훈이 끝나고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마태복음 8장에 나옵니다. 허다한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서 앞으로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문둥병자였습니다. 레위기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며 외쳐야 했습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항상 진 밖, 광야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죽은 자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고쳐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하시면,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감히 청할 수도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만이 유일하게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뜻이 있으시다면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셔도 저는 아무 할 말 없는 부정한 자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고백과 같습니다. 주님, 저는 부정한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신다면,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율법으로는 접촉 자체가 금지된 자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즉시 문둥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문둥병은 살이 썩고 세포가 죽어가는데 본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병입니다. 통점이 무뎌져 아프지 않습니다. 썩어가는 줄 모릅니다. 이것이 죄 안에 있는 인간의 초상입니다. 죄가 자신을 사망으로 끌고 가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영적 문둥병입니다.

그 문둥병자가 광야에서 나왔습니다. 예수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이 부정한 자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깨끗해졌습니다. 광야는 문둥병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그 광야입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광야 사십 년을 걸어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알려 하심이라." 낮추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 출애굽했음에도, 왜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십 년을 광야에서 헤매야 했습니까? 열두 정탐꾼 중 열 명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근거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 자신들은 메뚜기 같았고, 적은 거인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의 판단이 앞섰습니다. 광야는 그 판단이 무너지는 곳입니다. 내가 무엇인지가 폭로되는 곳입니다. 내 힘으로 살 수 없음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은혜를 배우는 교실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마가복음은 문둥병자를 고치신 장소를 분명히 밝힙니다. 에레모스, 광야,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들이 사는 그 광야에 예수님이 머무셨습니다. 레위기의 아사셀 염소가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쫓겨나가 죽었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성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광야는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여 가나안 자격을 갖추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문둥병자에 불과함이 거듭 확인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이 거듭 증명되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짧은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이 두 글자가 전부입니다. 창세전에 정해진 사랑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변개되지 않습니다. 실망시켜도, 배신해도, 무너져도, 끝까지입니다. 그 선언 아래서 예수님은 일어나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담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이 종이 되셨습니다.

베드로가 막아섰습니다. "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제서야 베드로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미 목욕한 자, 십자가 피로 이미 깨끗해진 자, 그들의 발을, 주님이 친히 씻기십니다. 이것이 우리 쪽의 회개 노력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겨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종이 되어 씻기십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너희는 이미 내 피로 목욕한 자들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너희가 이 광야를 살아가는 힘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성도의 삶은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발 씻기심을 몸으로 그려내는 것, 내가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목욕한 사람임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 설교도, 봉사도, 헌금도, 그 의미 안에서라야 삽니다. 그것이 나의 의가 되는 순간, 그것은 죽습니다. 출애굽기 21장에는 흥미로운 율법이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 종은 육 년을 섬기면 칠 년째에 자유를 얻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준 아내와 그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데려갈 수 없습니다. 신부와 함께 살고 싶다면, 자유를 포기하고 영원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 증표로, 문설주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뚫습니다. 그 흔적이 영원히 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우리 같은 자들과 혼인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고 못에 박히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도마에게 그 흔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자국들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위해 영원히 종이 되기로 선택하셨다는 영원한 증표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발을 씻기고 계신 분이 그 신랑입니다.

로마서 3장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으로는 안 됩니다. 선행으로도, 헌금으로도, 봉사로도, 눈물의 결심으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국밥 앞에서 '싫단 말이야'를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직접 준비하신 의를 내미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저 주어지는 의, 값없이, 아무 조건 없이, 그래서 바울은 묻습니다. "자랑할 데가 어디뇨?" 그리고 스스로 답합니다. "있을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광야에서 준비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내어놓을 무언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빈 그릇입니다. 아사 직전의 굶주린 자에게 빵 한 조각이 생명이듯, 복음은 자신이 문둥병자임을 아는 자에게만 생명이 됩니다. 배부른 자에게 복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됩니다.

말씀은 우리를 폭로합니다. 반드시, 결국, 우리를 광야의 문둥병자로 드러내고야 맙니다. 그때 그 거울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행위로 가리려 하지 마십시오. 그 거울을 똑바로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 더러운 몸을 벗게 되었음을 보십시오. 그것을 보는 눈이 열릴 때, 그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진짜 사랑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처음부터 그것이었습니다. 율법도, 선지자도, 십자가도, 모두 그 한 가지를 위해 있었습니다.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국밥이 아니라 그 마음을 원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발을 씻기고 계신 종 되신 신랑의 은혜를 배우십시오. 그 은혜를 찬송하십시오. 그것이 성도의 본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