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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분노하라, 너의 역사와 너의 인생에 분노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5.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로마서 4:9~16)

어느 노인이 평생 공들여 가꾼 정원이 있었습니다. 봄이면 장미가 피고, 여름이면 수국이 피었습니다. 이웃들은 담장 너머로 그 정원을 기웃거렸고, 노인은 기꺼이 꽃을 나눠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너그러운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가뭄이 들었습니다. 우물이 마르고 꽃들이 시들기 시작하자, 노인은 대문을 잠갔습니다. 더는 꽃을 나눠 줄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웃들은 수군거렸습니다. "
저 사람, 원래 저런 사람이었어." 그러나 사실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여유가 있을 때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1990년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단어가 있었습니다. 똘레랑스, 프랑스어로 '
관용'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를 처음 한국에 소개한 사람은 홍세화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연루되어 수배를 받다 프랑스로 망명한 그는, 파리에서 택시를 몰며 생계를 이어가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썼습니다. 그 책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책의 핵심은 간단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서로 다름을 허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옳더라도 네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똘레랑스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열광했습니다. 보수도, 진보도 너나 할 것 없이 관용을 입에 올렸습니다. 교수들은 강단에서, 신문 칼럼니스트들은 지면에서, 심지어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이 단어가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러나 그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냄비처럼 빠르게 식었습니다. 관용이 말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뿌리내리려면 무언가 다른 토양이 필요했는데, 그 토양이 없었던 것입니다. 관용은 설득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홍세화가 관용의 나라라 찬탄했던 그 프랑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업률이 치솟고, 물가가 오르고, 가난한 사람들이 시장에서 장 한 번 보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사르코지 정부는 외국인 노숙자와 집시들을 강제 추방하는 이민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유엔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관용을 베풀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 강경 정책에 박수를 쳤습니다. 그들이 기꺼이 박수를 보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저 사람들이 내 밥그릇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관용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 지점입니다. 내 삶이 풍족할 때, 내 안전이 위협받지 않을 때, 내 밥그릇이 온전할 때, 인간은 얼마든지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무대 위의 배우처럼 훌륭한 연기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건이 흔들리는 순간, 관용은 분노로 탈바꿈합니다. 사랑이 증오로 돌아선다면, 처음부터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연극이었을 뿐입니다.

이 현실에 분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테판 에셀, 프랑스의 사회 운동가입니다. 아흔세 살의 이 전직 레지스탕스는 단 60페이지짜리 얇은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제목은 간결했습니다. 『분노하라』그 책은 순식간에 전 세계 서점가를 강타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
약자를 짓밟는 이 불의한 세계에 분노하라, 봉기하라, 투쟁하라, 그래야 진정한 관용과 평화와 평등이 온다." 읽으면 가슴이 뜁니다.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그러나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언했습니다. "
모두가 함께 생산하고 나누자. 착취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 유토피아를 건설하자." 누가 이 선언에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선언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의 실험은 1억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유토피아라는 단어 자체가 그리스어로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곳입니다.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낳습니다. 혁명이 또 다른 억압을 낳습니다. 이상향을 향한 투쟁이 또 다른 소외와 계급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다시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 탈주합니다. 역사는 이것을 반복해 왔습니다. 철학자 들뢰즈는 이것을 노마디즘이라 불렀습니다. 끝없는 유랑, 정착했다 싶으면 또 무너지고, 다시 길을 떠나는 반복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모든 시도의 뿌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아담, 히브리어로 흙, 없음이라는 뜻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 온 만물을 다스리도록 부름받은 존재의 이름이 왜 '
없음'입니까? 그 이름 속에 비밀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없음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있음이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받아야 비로소 생령이 되는 존재입니다. 흙 자체는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없음이 만들어 내는 세상은 결국 없음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아담은 이것을 잊었습니다. 뱀이 속삭였습니다. "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아담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이 답답했습니다. 구차하게 느껴졌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 스스로가 왕이 되는 삶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스스로 복을 만들어 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복의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린 것입니다. 헬라어로 행복을 뜻하는 마카리오스라는 단어 자체가 '위에서 아래로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복은 수직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 인간들은 수평으로 달리면서 복을 쟁취하려 합니다. 그 쟁취의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선행 체계, 즉 종교와 도덕과 윤리. 그리고 지식 체계, 즉 교육과 이념.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 낸 모조품 복의 생산 라인입니다.

15세기 르네상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들은 꿈꿨습니다. 사람들을 잘 가르치고, 도덕적 인간을 만들고, 지식을 넓히면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꿈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 꿈의 끝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 있었습니다. 가장 고도로 교육받고, 가장 정교한 철학을 가졌으며, 가장 발달된 과학 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이 수천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무식해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 배웠기 때문에 더 정밀하고 효율적으로 죽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세대 전과 비교해 보십시오. 지금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웁니다. 교회는 도처에 있습니다. 정보는 넘쳐흐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착해졌습니까? 더 너그러워졌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각박하고 더 외로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선행 체계와 지식 체계의 생산 라인은 가동될수록 더 많은 모조품을 쏟아 낼 뿐입니다.

2010년대 초, 생태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현재의 인류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속의 개구리." 물이 조금씩 데워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채 온기를 즐기다가 결국 삶아지는 개구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비율이 올라가고, 산호초가 사라지고, 꿀벌이 죽어가고, 빙하가 녹고 있습니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인간의 노력이 오히려 세상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없음이 만들어 내는 세상의 결말은, 어디서 출발하든 결국 없음으로 향합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집요하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 할례를 받기 전입니까, 후입니까? 창세기를 펼쳐 보면 답은 명확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먼저 의롭다 칭함을 받고,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이 옵니다. 할례 이전에 이미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미 의롭다 칭해진 아브라함에게 굳이 할례를 명하셨을까요? 바울은 11절에서 대답합니다. 그것은 표식이요 인침이라고 말입니다. 이미 완료된 구원의 현실을 역사 속에서 확증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할례 행위 자체에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5장의 장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쪼갠 짐승들 사이로 언약 당사자가 지나가는 것이 당시의 언약 체결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선언이었습니다. 이 언약을 어기는 자는 이 짐승처럼 쪼개질 것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이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진 뒤 횃불과 연기 기둥, 곧 하나님께서 혼자 그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깊은 잠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이 언약의 성취는 전적으로 하나님 혼자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사래가 생산하지 못하자 조바심이 났습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인간의 열심을 보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사래를 생산하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까지 다 사라지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후 하나님은 13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습니다. '
아직 힘이 남아 있구나.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99세, 사래가 경수가 끊어진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셨습니다. 완전히 마른 장작이 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는 생식 능력을 제로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
너는 이제 아무것도 생산해 낼 수 없는 자다"라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을 몸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이해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오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쪼개지셨을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예수의 할례, 예수의 쪼개짐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13년의 침묵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간절히 구했는데 이뤄지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구원받았다는데 삶은 왜 이 모양인지, 예수 믿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이 하나님이 삐지신 것이 아닙니다. '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중년의 집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사업을 해왔고, 일이 잘 될 때는 교회에서도 활발하게 봉사했습니다. "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고 간증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보증을 잘못 섰다가 집을 잃었고,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오기가 부끄러웠습니다. 한동안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조용히 나타난 그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잘 될 때는 제가 잘한 줄 알았어요. 이제야 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압니다." 그 고백이 바로 할례입니다. 생산 능력 제로의 자리, 그 자리에서 비로소 은혜가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스위치를 뽑았다 꽂았다 하시는 것 같은 경험을 허락하십니다. 어느 날은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기도가 통하는 것 같고, 삶이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또 어느 날은 아무것도 안 됩니다. 분명히 돌아갔는데 다시 멈춥니다. 이 반복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꽂아 주셔야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에 그 반복을 허락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선언합니다. 복은 창세 전에 이미 주어졌다고,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복을 주셨다고, 복은 이 세상에서 잘해서 하나님께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보면 "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너는 복이다"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복입니다. 잘해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그 존재 자체가 복입니다. 그러니 그 복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유전받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어떤 인생이었습니까?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넘겼습니다. 두려워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약속을 받고도 기다리지 못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기각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올라간 모리아 산에서, 심장에 칼을 꽂으려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
멈춰라." 그리고 수풀에 걸린 숫양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이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혼자 성취하신다는 것을 그제야 온몸으로 알았습니다.

그 인생이 복입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부끄러운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는 그 과정 속에서, 결국 "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신다"에 이르는 그 여정이 복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전되어 오는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스테판 에셀은 불의한 세상에 분노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불의합니다. 약자는 짓밟히고, 강자는 군림합니다. 그러나 그 세상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담 이후 필연적 결과입니다. 흙이 만들어 낸 역사는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에 분노하는 것은, 마치 씨앗을 심지 않은 밭에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그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
하나님, 저를 더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이 기도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내 소원을 이루어 주는 도구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착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줄 때를 기억하십니까? 처음에는 뒤에서 안장을 잡아 줍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잡고 있는 줄 알고 페달을 밟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버지는 손을 놓습니다. 아이는 자기 힘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면 아버지가 멀리 서서 웃고 있습니다. 그때 아이는 깨닫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그 깨달음이 오기까지, 아버지는 언제 손을 놓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렇게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 역사는 율법 아래에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엇을 합니까? 율법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광야 40년을 돌았던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두고 그들은 40년을 돌았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자격과 조건을 자꾸 따졌기 때문입니다. "
우리 힘으로는 안 돼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한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것이 역사가 하는 일입니다. 흙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2세대가 은혜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똑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정확하게 해석합니다. 하갈은 율법이고 사라는 은혜입니다.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율법의 행위로 만들어 낸 것이고,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으로 온 것입니다. 그 이스마엘은 이삭을 핍박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은혜를 핍박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주의와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은혜만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을 '
행동 없는 자들'이라고 비웃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마엘은 이삭을 핍박합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그 순간 여인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착하게 살겠습니다"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가 한 일을 다 말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복 받은 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이 고백을 합니다. 내가 한 일을 다 알고도 여기 서 계신다는 것, 그 자체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나사로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가 거지입니다. 헌데를 개가 핥고 있어도 개를 쫓을 힘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복 받은 자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 복 받은 자의 지향점입니다. 반면 부자는 이 세상에서 번드르르하게 잘 삽니다. 그러나 그 번드르르함이 영원 속에서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그 이야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망하셨습니까? 복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며 '
어떻게 이런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나' 싶으십니까? 복 받으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결코 그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복 받은 자만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3년을 기다리셨듯이, 지금 우리의 침묵의 계절에도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에게서 마지막 남은 가능성까지 사라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야 이삭이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홀로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고 외칩니다. 맞습니다. 분노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세상을 향해 분노하기 전에, 먼저 이 세상을 하나님 없이 고쳐 보겠다는 나 자신에 대해, 하나님을 도구로 삼아 내 복을 스스로 만들어 내려는 나의 아담적 욕망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그 분노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을 홀로 성취하시기 위해 쪼개지신 예수를 봅니다. 우리가 쪼개져야 했는데, 예수가 쪼개지셨습니다. 거기서 흘러내리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것, 쟁취한 것이 아니라 거저 받은 것, 그것이 마카리오스, 복입니다.

당신의 인생 속에 지금 할례가 진행 중입니까? 아무것도 생산해 낼 수 없는 자리로 내몰리고 있습니까?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삭을 주시려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