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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죽어야 사는 여자, 그 이름 교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30.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18~25)

어떤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젊음을 잃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조금씩 깊어지는 주름이, 조금씩 처지는 눈꼬리가 공포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크림을 바르고, 시술을 받고,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했습니다. 그 모든 노력이 한 가지 목적을 향해 있었습니다. 죽지 않겠다는 것, 늙지 않겠다는 것, 사라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막으려 할수록, 삶이 더 추해졌습니다. 웃음이 사라졌고, 관계가 메말랐고, 거울 앞에서만 살다가 거울 밖의 세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죽지 않으려다가, 정작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1992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만든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는 이 역설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블랙코미디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겠다는 묘약을 마신 두 여자는 결국 목이 180도 돌아가고, 배에 총알이 뚫려도 죽은 줄 모르고 산산조각이 난 채로도 눈을 껌벅이며 살아있으려 합니다. 반면 묘약을 거부하고 제때 죽은 맨빌 박사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의 눈물과 칭송 속에 진짜로 살아있습니다. '
죽어야 산다.' 이것이 그 영화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이 오늘 로마서 본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어디서 왔습니까? 창세기 2장 7절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다마 인 아파르로 사람을 지으시고." 아다마 인 아파르는 땅에 속한 티끌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땅에 속한 '없음'입니다. 인간의 첫째 재료는 무(無)입니다. 그 없음에 하나님의 생기, 르와흐가 불어넣어지자 비로소 산 자가 됩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은 그 생기를 가리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 곧 메시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진실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기, 그리스도의 피가 얹어질 때만 비로소 존재로 성립됩니다. 이것이 처음 자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피조물이 그 자리가 불만스러웠습니다. 흙이 흙인 것이 싫었습니다. 없음이 없음인 것이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에 손을 뻗었습니다.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히브리 문화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자는 통치자이고, 재판관이고, 경영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금지된 과일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없음이 있음의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찬탈하겠다는 것입니다. 흙이 스스로 흙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죽은 줄 모르고 산 자인 척합니다. 영화 속 두 여자처럼, 목이 돌아가고 배가 뚫려도 죽은 줄 모르는 좀비처럼 말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던 날 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
주여, 저는 카탄입니다." 카탄은 '가장 작은 자', '없음'입니다. 왕이 된 사람이 처음 내뱉은 말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아뢰었습니다. "이 많은 백성을 어떻게 재판합니까.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하나님이 그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역설입니다. 왕이 "
나는 왕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진짜 왕이 됩니다. 선악 판단의 능력이 없는 빈 그릇임을 인정할 때, 하나님이 그 그릇에 당신의 지혜를 채우십니다. 인간이 완전히 비워질 때 하나님이 100% 채우실 수 있고, 그때 비로소 하늘 왕의 통치가 이 땅에 구현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생애 전체로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나니,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나의 판단이 아니라 아버지의 판단으로 판단하는 분, 이것이 하늘 왕의 존재 양식입니다.

어떤 아이가 아버지의 공장을 물려받았습니다. 기계도 모르고, 경영도 모르고, 직원들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날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 오늘 이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 이 직원은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매사를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직원들은 처음에 이 어린 사장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의 판단 뒤에는 수십 년의 경륜을 가진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을 때 가장 강한 경영자였습니다. 이것이 하늘 왕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통치자가 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주시면서 항상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
지키면 복을 준다." 사람들은 그 복에 눈이 멀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겠다고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명확하게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구원의 사다리가 아닙니다. 율법은 거울입니다.

어떤 사람이 면접을 앞두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섰습니다. 스스로는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반짝이는 금속 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셔츠 깃이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넥타이가 돌아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느꼈지만, 거울이 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율법이 그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지, 얼마나 '
있음'의 흉내를 내고 있는지, 얼마나 내 왕위를 지키기 위해 신앙 행위까지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폭로합니다.

예수님은 이 현실을 극단까지 체휼하셨습니다. 율법을 가장 완벽하게 지키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
율법을 지키면 산다"라면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선언입니다. '없음'이 율법으로 '있음'이 되려는 모든 시도는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부르짖으셨습니다. "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버려짐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버려짐은 하나였던 것 사이에서만 일어납니다. 처음부터 관계없는 것은 버려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기에 버려지실 수 있었습니다. 그 버려짐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율법을 지키며 쌓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이 못 박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없어진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고백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둘 다 죽은 것 같은 몸이었습니다. 백 세 된 남자와 아흔 살 된 여자입니다. 의학적으로, 상식적으로 생명이 나올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말합니다. "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고 그 죽은 태에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은혜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내가 쪼개져서 이 언약을 이루겠다고, 하나님이 친히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은 덜렁 이스마엘을 낳아 들고 옵니다. 증거가 보이지 않자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갈을 데려다가, 인간의 방법으로, 인간의 힘으로 열매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네가 율법으로 열매를 만들어 오겠다면, 완전하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명하십니다. 네가 이미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존재임을 몸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브라함을 비웃을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헌신해도, 봉사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조용히 자기만의 이스마엘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교회에서 더 인정받으려 하고, 더 경건해 보이려 하고, 더 많은 헌금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아브라함의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증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스마엘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십니다. 그때 얼마나 아픕니까? 내가 이만큼 했는데,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외면하시는 것 같을 때 그 고통은 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할례입니다. 네가 이미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약속을 붙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도를 여자, 신부라고 부릅니다.
엄마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엄마는 자기 몸을 아이의 먹이로 줍니다. 임신한 순간부터 엄마의 영양분은 탯줄을 타고 아이에게 흘러갑니다. 먹고 싶은 것을 아이가 원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하고 싶은 일을 아이를 위해 내려놓고, 자신의 몸이 변형되는 것을 감수합니다. 사실 엄마는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죽여서 아이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를 낳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자존심과 나의 '
있음'이 죽어 그 자리에서 예수가 태어납니다. 나의 이스마엘들이 하나씩 부정될 때, 나의 쌓아올린 것들이 하나씩 무너질 때, 그 자리에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것이 예수를 낳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평생 교회를 위해 살았습니다. 봉사하고, 헌금하고,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몸이 아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봉사도 못하고, 헌금도 줄어들고, 새벽기도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자신이 얼마나 쓸 만한 사람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살았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 그 집사님은 그 기도가 평생 자신이 드린 가장 정직한 기도였다고 했습니다. 죽은 태에서 이삭이 나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됩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 편지를 보내십니다.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당대에 활력 있는 교회였습니다. 행함이 넘쳤고, 스스로도 살아있다 했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는 죽어있었습니다. 영화 속 두 여자처럼, 자신이 죽은 줄 모르고 살아있는 척하는 좀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받았습니다. 십자가로 살아났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어있는 교회에 몇 사람이 살아있었습니다. 흰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계시록 7장은 그 흰옷이 어린 양의 피에 빤 옷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피를 붙드는 자들, 자기 이스마엘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드는 자들, 그들이 진짜 살아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어있는 교회 안에서, 맞아가면서도 거기 붙어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자들, 그것이 교회입니다. 죽어야 사는 여자, 그 이름이 교회입니다.

어떤 사역자가 보육원 사역을 할 때, 보육원 아이들과 블루마블 게임을 자주 했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이라 무슨 게임이든 목숨을 걸고 했습니다. 사역자는 게임을 워낙 못해서 항상 가장 먼저 털렸습니다. 빌딩도 땅도 다 날리고 나면 아이들이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럼 할 게 없어서 현실이 보입니다. '집에 가야겠다. 아버지가 기다린다.' 한참 뒤 선생님들이 들어와서 게임판을 엎습니다. "
자, 이제 자야지." 그때 아이들이 돈 뭉치와 빌딩 모형을 손에 쥔 채 멍해집니다. "나 어디로 가야 돼?" 선생님은 아버지 만나러 간다는데,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결국입니다. 하나님이 이 판을 엎으실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쌓은 모든 것, 인격, 성숙, 재물, 평판, 종교적 업적들을 들고 어디로 갑니까?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로마서 4장 24절이 말합니다. "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 예수님은 스스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살려내셨습니다. 완전히 죽어 아무것도 없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성도의 삶이 그렇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이스마엘들이 부정당하고, 내가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없어진 그 자리에서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하고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살려내십니다. 그것이 부활의 몸이고,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내가 이만큼 살았다는 것을 붙들고 있습니까? 내가 이만큼 봉사했다는 것, 이만큼 기도했다는 것, 이만큼 헌금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밀고 있습니까? 아니면 "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의 피를 붙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죽어야 삽니다. 안 죽으려고 할수록 더 추해집니다. 목이 돌아가고 배가 뚫려도 죽은 줄 모르는 좀비처럼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이스마엘들을 하나씩 부정하시고, 내 이 자랑스러운 것들을 하나씩 무너뜨리실 때, 그 고통의 자리가 사실은 하나님의 가장 깊은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가 태어납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삽니다. 죽어야 사는 여자, 그 이름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각자의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