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3~25)
어느 마을에 종일 등불을 들고 다니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그는 등불을 켜 들고 골목마다 외치고 다녔습니다. "신은 어디 있는가! 신을 보신 분 없습니까!" 동네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보며 웃었습니다. 나중엔 아예 대놓고 놀렸습니다. "이봐, 자네가 찾는 신은 아마 길을 잃었나 보네. 아니면 우리가 무서워서 어디 숨어서 못 나오는 걸지도 모르지." 사내는 그 말을 듣고 며칠 밤을 뒤척였습니다. 정말 그런 걸까, 신이 길을 잃은 걸까, 숨어 있는 걸까? 그러다 어느 날 그는 등불을 땅에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니야. 신은 길을 잃은 것도, 숨은 것도 아니야. 그는 죽었어. 우리가 그를 죽인 거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9세기의 철학자 니체입니다. 그가 내린 결론, "신은 죽었다"는 한마디는 단순한 철학적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해오던 일, 하나님이라는 상위 권위를 자기 삶에서 몰아내는 일을 소리 내어 선포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세상에서는 '아버지'들이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1919년,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한 학자는 논문을 통해 "이제 아버지 없는 사회가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권위의 자리가 하나둘 비어 갔습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 광경을 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신이 죽고 아버지가 죽었으니, 이제 인간이 의지할 대상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자기 자신마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인류는 이미 죽은 것이다."
당신은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철학자들의 케케묵은 논쟁처럼 들리십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아주 오래된,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상위 권위의 선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는 뱀의 속삭임에 넘어가,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냈습니다. 니체와 프롬의 시대에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니라,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된 인류의 뿌리 깊은 성향이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반복되고 있는 것뿐입니다.
상위 권위를 몰아낸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밖에서 나를 붙들어 주던 것이 사라지면, 사람은 자기 자신 안으로 숨어듭니다. 마치 껍데기 속으로 파고드는 달팽이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의 본능과 욕망에 충실한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흙 속에 갇힌 상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본래 흙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생기 없이 스스로 존재하려 하니, 그 흙 자체 안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불이 활활 타는 저 먼 곳의 형벌만이 지옥이 아니라, 나만을 위해 사는 것, 나를 높이는 것 자체가 이미 지옥의 시작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는 사실 진짜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살 자유", 즉 방종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런 자유가 활개칠 때가 있습니다. "내 천국, 내 구원, 내 상",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결국 계산하는 것은 내 몫이 얼마나 되는가입니다. 이렇게 상위 권위를 다 몰아낸 인간들의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몇 해 전 일본에 큰 지진과 쓰나미가 덮쳤을 때, 뉴스는 참혹한 소식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전해지던 바로 그 시각, 한국의 전자업계와 자동차업계 일부에서는 조용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경쟁사의 공장이 멈추었으니, 우리 회사의 시장 점유율이 오르겠구나 하는 계산이었습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경쟁 관계에 있던 IT 기업들의 주가가 슬며시 올랐습니다.
전쟁이 나면 제약회사 주식이 오릅니다. 도시가 무너지면 중장비 회사가 호황을 누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적나라한 얼굴입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이익이 되는 구조 속에서, 인간은 타인의 시체 앞에서 손익계산서를 뽑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일까요?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실체입니다.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가 쓴 소설 『25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신분이 뒤바뀐 주인공에게 사람들이 계속 묻습니다. "너는 대체 누구냐? 유대인이냐, 독일인이냐?" 그런데 정작 그 자신도 나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당신은 이 질문에 답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정확하게 답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지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4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도 에두르지 않고 답합니다. 당신의 정체는,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했을 만큼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이렇게 읽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나를 용서하시려고 부활하셨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원어를 세밀히 살펴보면 이 구절은 이렇게 옮겨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를 넘겨주었고, 우리의 의가 예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주어가 다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가 그분을 십자가에 넘겨준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법정에서 죄인을 사형대로 넘기는 판결문에 도장을 찍는 손이 있다면, 그 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손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등을 십자가 쪽으로 떠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살해"의 실체입니다. 신학적으로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이, 자기보다 높은 존재를 참을 수 없어서 결국 그를 죽여 버린 것이 인류 역사의 반복이고,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후반부가 놀랍습니다. "우리의 의가 예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우리를 죽이려던 손이, 이제는 그 예수님을 찬양하는 손이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 위에 당신의 의를 덮어 주셔서, 그 죄인이 이제는 살인자의 손을 들어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후패하다'는 표현은 사실 "철저하게 무너지다, 완전히 부서지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오래된 한옥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낡은 한옥을 수리할 때, 어설프게 페인트만 덧칠하는 것과, 아예 기둥까지 뜯어내고 새로 짓는 것은 완전히 다른 작업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페인트칠이 아닙니다. 기존의 나를 조금씩 다듬어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성숙의 과정이 아니라, 낡은 기둥이 통째로 무너지고 그 자리에 전혀 새로운 집이 들어서는 일입니다.
바울도 이 과정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이것은 그가 회심하기 전의 고백이 아닙니다. 사도로서 왕성하게 사역하던 중에 한 고백입니다. 얼마나 정직합니까? 어떤 육체적 고통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자신의 몸에 박힌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끝내 그것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이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착각하지 않도록, 사역의 열매가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의 능력임을 계속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고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외친 뒤, 그는 곧바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은혜를 깨달았다고 해서 완전히 극복된 상태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씨름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정직한 긴장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입니다.
바울은 또 다른 그림을 하나 그려 줍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한 도자기 마을 이야기를 상상해 보겠습니다. 도공들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흠 하나 없는 그릇만을 남기고, 조금이라도 균형이 어긋나거나 흠집이 있는 그릇은 가차 없이 깨뜨려 버립니다. 그들에게 그릇은 곧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엌에서 매일 밥을 짓는 어머니는 다릅니다. 그릇에 살짝 이가 나갔어도, 색이 조금 바랬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그릇 안에 무엇을 담을 수 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밥그릇은 밥을 담을 때 밥그릇이고, 국그릇은 국을 담을 때 국그릇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그릇도 요강으로 쓰이면 요강이 되고, 아무리 투박한 질그릇도 귀한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됩니다.
우리는 전시용 작품이 아니라 담아내는 용도로 지어진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네가 얼마나 세련되게 다듬어졌느냐"가 아니라 "네 안에 예수가 있느냐"입니다. 흠이 있어도, 균형이 좀 안 맞아도 괜찮습니다. 담을 것을 확실히 담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못 이겨 아내를 누이라 속인 사람이었고, 야곱은 형을 속이고 도망친 사람이었으며, 다윗은 남의 아내를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도, 그가 특별한 기술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평소 양을 치며 곰과 사자에게 던지던 그 익숙한 돌팔매를 그대로 던졌을 뿐인데, 하나님이 그 돌을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히 맞추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삽니다. "가난한 것은 나쁜 것", "성공한 것은 좋은 것", "아픈 것은 불행한 것", "건강한 것은 축복받은 것", 누가 이런 기준을 세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다름 아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예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잣대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 저울을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내가 세운 선악의 기준으로 나 자신과 남을 계속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권 자체를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난해도 괜찮고, 병들어도 괜찮은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상황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판단하던 나의 권한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심판의 언어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입니다. 흙에서 난 인간이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려 애쓰다 지쳐 쓰러질 때,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며 오히려 인간을 원래의 자리, 곧 창조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자리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 "산 자의 어미"라 짓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짐승의 피 흘림으로 마련된 옷이 십자가의 첫 그림자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배 속에서부터 장자의 복을 약속받았지만, 눈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형 에서는 건장한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그럴 만한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증거를 만들어 냅니다. 염소 가죽을 팔에 두르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복을 가로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야곱은 집에서 쫓겨나 빈손으로 광야를 떠돕니다. 돌베개를 베고 잠든 그날 밤, 그는 꿈에서 하늘까지 닿는 계단을 봅니다. 그런데 이 계단은 땅에서부터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 보내신 계단이었습니다.
이와 정반대되는 계단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바벨탑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며 벽돌과 역청으로 계단을 쌓아 올렸습니다. 놀랍게도 이 인간의 집념은 시대를 넘어 반복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하늘로 향한 계단은 왕을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 변변한 장비도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무게가 몇 톤씩 나가는 돌덩이를 매 시간 열다섯 개씩, 4분에 하나씩 쌓아 올려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집념입니까. 그러나 그 집념의 방향은 하나였습니다. "내 힘으로 하늘에 닿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바벨탑 쌓기를 막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의 백성이 쌓으려는 바벨탑만은 무너뜨리십니다.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고, 인생 계획이 어긋나고, 애써 쌓아 온 것이 흔들릴 때, 그것은 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네가 쌓아 올리는 계단으로는 하늘에 닿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은혜의 손길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 야곱의 사다리가 당신 자신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은 정결예식에 쓰던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 그것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항아리가 여섯 개였을까요?
성경에서 완전수는 일곱입니다. 여섯 개의 항아리는 인간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려던 율법의 노력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결국 텅 비어 있었고, 아무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번째 항아리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십니다(요 19:28).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군인들이 신 포도주를 우슬초에 적셔 그분의 입에 대었습니다. 우슬초는 출애굽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던 바로 그 도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순간, 그분의 피가 흘러 우리를 위한 우슬초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문설주에 피를 바른 각 집 안에 완전한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도둑질하는 자도, 부부싸움을 하던 자도, 그날 밤 온갖 허물을 지닌 자들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집 안의 내용물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고 넘어가셨습니다. 새 언약의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 위에 발려져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는 원래 '없음'이었습니다. 갓난아기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규정할 수 없듯이, 우리도 본래 스스로를 '나'라고 세울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라면서 부모의 자녀로, 학교의 학생으로, 직장의 일원으로, 누군가의 배우자로 자기 정체성을 하나씩 쌓아 갑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이 땅에서 얻은 정체성, 곧 성경이 말하는 '육'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 육으로 얻은 정체성들이 하나씩 흔들리는 순간이 옵니다. 자식이 잘못되거나, 사업이 무너지거나, 건강을 잃거나, 관계가 깨질 때, 우리는 "나는 대체 뭐지?" 하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순간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안의 육을 걷어 내시고 그 자리에 성령으로 다시 세우시는 과정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6) 성공가도를 달리던 삶이 어느 순간 뜻대로 되지 않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다시 빚으시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기가 다시 우리를 덮으십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갓난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는 기저귀를 적셔도 부모에게 사과의 말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저 울 뿐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 기저귀를 갈아 주고, 그 아기를 여전히 사랑스럽게 안아 줍니다.
만약 아기가 "아버지, 제가 또 실례를 했습니다. 노력하여 횟수를 줄이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아기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계산된 다짐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완전히 맡겨진 상태입니다. "아빠만 믿어"라는 말은 "내가 다 책임지겠다"는 뜻이지, 아기의 노력을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잘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과 연약함을 그대로 아버지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긍휼'과 '자궁'이 같은 단어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자궁에서 아기를 낳듯,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우리의 자격을 따져서 조금씩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나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우리의 신학이 얼마나 정교한지, 우리의 인격이 얼마나 성숙했는지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 불렀습니다.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우리의 인생이 겉으로 보기에 초라하고,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여전히 흠 많은 질그릇처럼 보일지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작품이 아니라 그릇입니다. 우리는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은혜를 받는 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쌓아 올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계단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이제 우리는 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기가 덮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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