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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살고 싶은 자들의 죽음과 죽고 싶은 자들의 부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22.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17~25)

1967년 1월, 캘리포니아의 한 연구소에서 인류 최초의 냉동인간이 탄생했습니다.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심리학자 제임스 베드퍼드 박사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지금 죽되, 완전히 죽지는 않겠다고,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 속에 자신의 몸을 봉인하면, 언젠가 의학이 발전했을 때 다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 말입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베드퍼드 박사는 아리조나의 알코어 재단 냉동 캡슐 안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 현재 33명이 같은 방식으로 보존되어 있고, 전 세계 400여 명이 예약을 마쳤습니다. 전신 보존료 10만 달러, 두부(頭部)만 보존할 경우 3만 5천 달러입니다. 이 기묘한 숫자들 앞에서 죽음을 앞둔 인간이 마지막으로 붙드는 것이 결국 '
조금 더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잠시 멈추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베드퍼드 박사만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냉동 보존하려 합니다. 더 건강해지려 하고, 더 오래 기억되려 하고, 더 많은 것을 쌓아두려 합니다. 이승을 붙들려는 인간의 손은 놀랍도록 집요하고, 그 힘은 죽음 앞에서도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붙들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은, 과연 실재입니까? 한 가지 실험을 해보십시오. 지금 창밖의 가을 풍경을 바라보십시오. 감동이 오십니까? 아마 대부분은 그냥 지나칠 것입니다. 그런데 비발디의 '
사계'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 농촌의 일몰 앞에서는 그저 고단함만 느끼지만, 밀레의 '만종' 앞에서는 숙연해집니다. 왜 우리는 실재보다 그것을 흉내 낸 허상 앞에서 더 크게 감동하는 줄 아십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실재를 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재가 품고 있는 날것의 진실, 즉 인간의 유한함과 무력함과 필연적인 소멸을 직면하기보다, 그것을 아름답게 포장한 허상 앞에서 위안을 얻는 쪽을 택합니다.

의자와 그림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의자가 실재이고,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허상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의자 자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림자를 향해 "
참 아름답다"고 열광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묵시, 즉 하나님 나라가 실재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는 그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림자에만 열광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목숨을 겁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알면서도 이 세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에덴이라는 영원한 기쁨의 나라 안에 동산을 잠시 세우시고, 거기에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심으셨습니다. 성막의 지성소 밖 성소에 촛대와 떡상을 두셨습니다. 가나안 앞에 광야 사십 년을 허락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이 세상은 누리고 발전시켜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몸으로 배우는 교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그림자를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한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계가 출발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자기 능력으로 세상을 만들어가겠다고 나선 그 순간부터, 아담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930년을 달린 끝에,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
시간이 흐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확히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달리는 것입니다. 자기 가능성을 증명하려고, 자기 능력을 쌓으려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보려고 열심히 달립니다. 그리고 그 달음질의 끝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죽음입니다.

거북이가 아무리 장수해도 죽습니다. 학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운동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의학의 힘을 빌려도 결국 죽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죽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것 자체가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썩어짐의 종노릇 하다가, 결국 사망으로 떨어지는 것이 선악과 이후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서 성공과 번영과 성숙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무리 선하게 포장해도 결국 죽음을 향해 더 빨리 달리는 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두신 것은 역사를 완성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뼛속 깊이 깨닫고, 그 깨달음 위에서 참된 소망을 붙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보면, "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전능한 분이다. 우리도 믿으면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자랑이 아닙니다. 그는 구원의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창조는 반드시 '
아무것도 없음'을 전제합니다. 뭔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 수정이고 개선입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 혼돈과 공허가 있었습니다. 가나안을 주실 때, 이스라엘이 건축하지 않은 집, 심지 않은 포도원, 파지 않은 우물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손이 단 한 치도 기여하지 않은 곳에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는 '
없음' 위에서만 부어집니다. 내가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자리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인간의 수정과 보완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수정과 보완이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썩어지고 죽어지는 것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진짜 뜻은 이것입니다. 오직 죽은 자만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죽은 자의 자리에 엎드린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바울은 아브라함이 "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의지를 불태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에서 '바랄 수 없는 중'이란 표현은 '믿음의 반대편에 서있음'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있었습니다. 백 세 노인의 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라의 태, 아브라함은 이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 웃지 않았습니까?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은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스스로도 포기했습니다. 그는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19절이 전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여기서 주어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믿음'이 주어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이 홀로 일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 포기했을 때, 믿음이 홀로 약해지지 않고 서서, 그를 붙들었습니다.

씨앗 하나를 생각해보십시오. 씨앗은 땅속에서 먼저 자기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껍질이 썩어야 싹이 나옵니다. 껍질이 살아있는 한, 그 안의 생명은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기 가능성이라는 껍질이 완전히 썩어 없어지자,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이 그 자리에서 싹을 틔웠습니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죽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이삭을 살렸고, 이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언약의 길이 열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나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버린 것이 세상적 욕심이나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버린 것을 읽어보면 놀랍습니다. 팔 일 만에 받은 할례,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삶, 한마디로, 누가 봐도 훌륭한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도둑질하고 거짓말하던 삶을 배설물이라 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율법의 기준대로 흠 없이 살았던 그 삶을 배설물이라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
해(害)'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신의 구원의 여정에 방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열심히 산 삶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정도는 한다'는 자의식이 있는 한, 그 자리에 창조의 은혜는 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뭔가 '있음'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난 후 겪은 것은 바로 이 깨달음이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나를 죽이고 있었다는 자각이 그를 매일 죽게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바울이 이것을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볼 때 그는 점점 맹해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옛날엔 저렇게 열심이던 사람이 왜 저러나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바울을 살렸습니다. 죽어가는 것들이 비워질수록,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리를 채우셨습니다.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수십 년간 한국 개혁주의 진영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많은 이들을 가르치셨던 분, 누구에게나 존경받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새롭게 만난 후 기존 공동체를 떠나셨고, 그 결과 온갖 모함과 비난을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일상에도 손을 대셨습니다. "
어제 은행에서 경매 통보를 받았습니다. 사업체와 모든 부동산, 집까지요. 그런데 마음은 이렇게 평안할 수가 없네요. 예수님이 살고 가신 제 인생을 알고, 내가 지금 주님의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나니, 모든 일들이 아주 작게만 여겨집니다. 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이런 실패 가운데 주심을 세상이 어찌 알겠습니까. 오늘은 집사님과 모처럼 먼 산에 다래 따러 가려고 합니다." 경매 통보를 받은 날, 아내와 손잡고 먼 산에 다래를 따러 가는 사람,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죽은 자의 자유입니다. 잃을 것이 없는 자의 평안입니다.

이분이 버린 것은 죄악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쌓아온 신학적 명성, 공동체 안에서의 위치, 사람들의 인정, 그리고 경제적 안정, 모두 훌륭하고 정당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씩 가져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처럼, 모리아 산 위에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자리에서, 이 장로님은 생애 가장 깊은 평안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창조입니다. 없음 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활은 이런 방식으로 옵니다.

마귀가 타임머신을 갖는다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십자가로 돌아갈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를 죽이지 못하게 막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무너뜨린 것이 마귀의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율법과 세상과 인간의 자아를 못 박았습니다. 인간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자기 힘으로 의를 이루려는 그 모든 시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역사 속에서 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인 것들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율법적 열심을 부추기고, 도덕적 성취를 복음이라 포장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고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패턴이 반복됩니다. 개혁이 일어나면 잠시 복음의 순수함을 회복했다가, 다시 인간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다시 개혁이 일어나고, 또 흘러갑니다. 마틴 루터가 "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외쳤을 때, 그는 단순히 면죄부를 비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뭔가를 보태어 의를 이룰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교회는 끊임없이 인간의 기여를 복음 안으로 끌어들여왔습니다.

바울이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열심히 사십시오. 가난한 자를 돕고, 세상을 섬기십시오. 그러나 그것으로 자신의 의를 쌓으려 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살다가 실패하고, 절망하며 예수를 붙드십시오. 내가 죽어야 할 자임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살고 싶어서 냉동 캡슐에 몸을 맡긴 베드퍼드 박사는, 어쩌면 지금도 깨어나는 날을 꿈꾸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설적인 진실 하나를 조용히 건넵니다. 살려고 달리는 자는 죽고, 죽으려는 자가 삽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위에서 이삭을 내려놓음으로써, 죽음으로써 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자랑을 배설물로 여김으로써, 날마다 죽음으로써 예수를 얻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경매 통보를 받은 날 먼 산에 다래를 따러 가는 여유로움 속에서, 생애 가장 깊은 기쁨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는 '
없음' 위에서만 부어집니다. 그 없음을 인정하는 것, 자신이 죽어야 할 자임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안에서 홀로 일하신 믿음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금 겪고 있는 상실이, 무너짐이, 자랑스럽던 것들이 배설물이 되는 그 쓰라림이, 어쩌면 하나님이 당신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계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고, 복음의 심장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