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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걱정 없어요, 잘 될거예요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도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로마서 4:1~8)

1996년 여름, 케냐 나이로비 외곽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국에서 온 선교사가 현지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
이 우물이 언제 고쳐질 것 같아요?" 우물 펌프가 고장난 지 사흘째였고, 마을 사람들은 두 시간 거리의 강까지 걸어가 물을 길어오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선교사의 다급한 표정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하쿠나 마타타." 걱정 없어요. 될 거예요. 어떻게든 될 거예요. 선교사는 속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이미 수리 기사에게 세 번 전화를 했고, 지역 관청에도 연락을 취했으며, 머릿속으로는 임시 급수 방안까지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에서 살아온 청년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선교사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친 것은 나뿐이었다."

한국 사람의 입에는 '
빨리빨리'가 붙어 있습니다. 음식을 씹으면서 계산대로 나오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도 전에 닫힘 버튼을 누릅니다. 케냐 사람들이 한국인에게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라고 합니다. 반면 케냐 사람들의 입에서는 '하쿠나 마타타'가 흘러나옵니다. 스와힐리어로 '걱정거리가 없다',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라는 뜻입니다.

영국 신경제재단이 178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행복지수 순위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습니다. 상위권은 방글라데시·바누아트·케냐 같은 나라들이 차지하고 있고, 미국은 150위, 러시아는 170위입니다. 한때 세계를 양분했던 두 강대국이 행복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일이 뒤에 벌어집니다. 이 행복지수가 알려지자 투자자와 이민자들이 그 나라들로 몰려들었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오고, 에어컨과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학교가 세워지고,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국민소득이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됐을까요? 행복지수가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환경이 나아졌는데 행복이 사라졌습니다. 하쿠나 마타타로 살 때는 재래식 화장실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
보다 나은 나, 보다 나은 미래'라는 목표가 생기자, 현재의 자신이 초라하고 불편하고 부끄러워졌습니다. 희망이 생기자 인간은 빨리빨리 달리기 시작했고, 달리는 만큼 행복은 뒤로 물러났습니다. 희망의 ''는 '바랄 희'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드물 희'와 혼용했습니다. 희망이란 그만큼 성취하는 이가 드문 것입니다. 그 드문 것을 향해 모든 인간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을 잃어갑니다.

밤의 라스베이거스는 눈부십니다. 수십 층 높이의 호텔 외벽을 가득 채운 형광빛,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간판들, 황금빛으로 물든 거리, 그러나 새벽 다섯 시, 사막의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면 그 모든 화려함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퇴색한 페인트, 먼지 쌓인 조명, 지저분한 콘크리트 외벽이 드러납니다. 밤에는 그토록 눈부시던 네온사인이 태양 앞에서는 그냥 쓰레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역사 속에서 열심히 쌓아 올린 모든 것, 그 문명과 도덕과 성취와 자존심의 탑이, 마지막에 빛이신 주께서 비추실 때 라스베이거스의 네온사인처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말라기는 그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지푸라기는 히브리어로 '코쉬', 말라비틀어진 집입니다. 역사가 내내 건설해온 그 집, 그 나라가 결국 말라비틀어진 집이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결국 불사를 것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당신의 백성을 두셨습니까? 그것은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 스스로 끝까지 쌓아보게 하신 다음, 그 옆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아방궁 옆에 놓인 하나님의 성전을 보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쌓아온 것의 실체를 압니다. 거기서 진정한 항복이 나옵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정치가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권력의 본질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군주는 자비롭고 경건한 것처럼 '
보여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그렇게 '보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상대를 짓밟을 때는 아예 완전히 뭉개버려야 복수할 엄두를 못 낸다고도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 말을 남깁니다. "모든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니 절대 믿지 마라."

이것은 단순히 정치가들의 행동 강령이 아닙니다. 자신을 주(主)로 삼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인간의 합의된 행동 원리입니다. 『군주론』이 오백 년이 지난 지금도 스테디셀러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군주의 자리를 확보하고 지키는 것이 선이고, 빼앗기는 것이 실패이자 악이라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
높아지려면 낮아지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왼뺨을 내밀라. 밟혀주라."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짓밟아서 군주가 되지만, 예수는 짓밟혀서 왕이 됩니다. 세상 나라는 '내가 주임을 증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이심을 인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이 마키아벨리즘을 유전자처럼 품고 태어납니다. 죄의 본질은 도덕과 법이 금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없음'이었던 자가 '있음'의 흉내를 내면서, 자신을 있게 하신 분의 은혜를 찬송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흙이었습니다. 티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없음이었던 자들이 스스로 있음을 증명하려 달려갑니다.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부르고, 교만이라 하고, 하마르티아(과녁을 벗어남)라고 합니다.

회계장부에는 차변과 대변이 있습니다. 차변에는 수입을, 대변에는 지출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장부를 상상해보십시오. 차변, 즉 우리의 선과 의가 기록되는 항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선을 생각하는 자도 없다." 차변에 기록할 것이 없습니다. 대변, 우리의 죄가 기록되는 항목에는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의 내용이 통째로 들어가야 합니다. 난잡한 욕망, 교만, 불순종,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그것이 우리의 대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대변 항목을 기록하지 않으신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
로기조마이', 우리 성경에는 '인정하지 아니하신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항목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안 적으십니다. 그것이 덮으심입니다. 가리심입니다. 동시에 같은 로기조마이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차변에 아무것도 기록할 것이 없는 우리의 장부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를 직접 기입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없는데, 판정권자의 권한으로 그냥 그렇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학은 이것을 전가라고 부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윗은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그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전장에서 우리야를 계략으로 죽였습니다. 그의 자의식은 누구도 대항하지 못한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린 용사, 원수를 두 번이나 살려준 관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 껍데기를 벗겨내자, 드러난 실체는 말할 수 없이 추악한 죄인이었습니다. 더 절망적인 것은 돌이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우리야를 살릴 수 없고, 더럽혀진 밧세바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때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경험에서 나온 것이 시편 32편입니다. "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선언합니다. 행복은 자아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같은 지점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15장, 바울이 로마서에서 인용하는 바로 그 '
믿음과 의'의 장면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이때 아브라함은 318명을 이끌고 4개국 연합군을 격파하고 개선한 직후였습니다. 대단한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850명의 선지자를 물리치고 나서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에 쓰러진 것처럼, 아브라함도 이겼는데 또 쓰러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꼴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
내가 네 방패다." 방패는 가려주는 것입니다.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너는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마누라를 팔아 이집트로 도망가고, 백삼십 살이 넘어 첩을 얻어 자식을 낳는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로기조마이 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의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어에서 '
긍휼'이라는 단어와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단어는 같은 어근을 씁니다. 옛날에는 혼용했습니다. 긍휼이란, 자궁 속 아이가 탯줄로 어머니와 연결되어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아는 자에게 흘러오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탯줄이 끊어지면 아이는 죽습니다. 뱃속에서 스스로 살겠다고 탯줄을 끊는 아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탯줄을 스스로 끊으려 합니다. "
나도 할 수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것이 선악과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불의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아보고 두렵고 떱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리를 이탈하여 스스로 있음의 흉내를 내겠다고 뛰쳐나온 것이 마귀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탯줄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
없음'을 보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면서도 '역시 저는 하나님 은혜 없이는 안 되는 존재'로 가는 것, 구제를 하면서도 '그 안에서도 내 안일을 챙기는 나를 발견하며 예수께 달려가는 것', 이것이 믿음이 만들어내는 행함입니다. 다른 종교인도, 무신론자도 헌금하고 구제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면서 자신의 '없음'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은 성령 받은 자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제단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대단한 신앙적 헌신이어서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오랜 실패의 역사가 먼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려면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아내를 팔아 목숨을 부지했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어 언약을 '
도와드리려'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에 필수적인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은 아브라함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번번이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도망갈 때도, 실수할 때도, 두려워 떨 때도,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 오랜 동행 끝에 아브라함은 깨달았습니다. '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신다.' 그 깨달음이 모리아 산에서 칼을 드는 손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삭이 여기서 죽어도 하나님은 내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만드실 것입니다. 제가 안 도와드려도 됩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나는 없어도 된다는 고백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녀를 신에게 바쳐 복을 구하는 몰렉 숭배자들의 헌신이 아닙니다. '
내가 없어도 하나님은 충분하십니다'라는 믿음의 항복입니다.

어느 교회 유치부의 샛별이라는 아이가 식사 기도 노래를 잘못 배웠습니다. 원래 가사는 "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인데, 샛별이는 이렇게 불렀습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당신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아이의 아빠는 그 노래를 듣고 눈물이 났습니다.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우리가 원하는 양식을 다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당신의 살과 피는 먹이십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예수를 떠나 아사 직전으로 달려가는데, 하나님은 그 뒤를 쫓아오시면서 당신의 피를 먹이고 계십니다. 그 집의 언니 하은이가 동생에게 가사를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양식을 주시는"이라고 고쳐줬습니다. 그러자 아빠가 정색하며 물었습니다. "양식을 안 주시면? 그럼 감사 안 할 거야?"

예수님은 양식을 안 주실 수 있습니다. 건강도 안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피는 늘 주십니다. 아사 직전의 죄인에게 매 순간 당신의 생명을 부어 주십니다. 이것이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이겠습니까?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 (롬 4:6)

세상 나라는 '
빨리빨리'로 바벨탑을 쌓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쿠나 마타타'로, 그분이 이끄시는 삶에 자신을 맡깁니다. 이것은 무책임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없어도 하나님은 충분하시다는 것을, 승리와 패배를 번갈아 살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를 자랑하고 찬송하는 삶, 그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라스베이거스의 네온사인은 밤에는 눈부십니다. 그러나 태양이 뜨면 쓰레기입니다. 우리가 평생 쌓아온 자존심의 탑도, 성취의 탑도, 도덕의 탑도, 그 빛 앞에 서면 결국 같은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 빛 앞에서 자신의 '
없음'을 인정하고 덮으심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차변 항목에 직접 기입해 주십니다. 일한 것이 없이 말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