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9~20)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웃에게 친절했고, 어려운 이를 외면하지 않았으며, 거친 말 한마디 함부로 내뱉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런 남편을 자랑스러워했고, 자녀들은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저 사람은 정말 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직장에 새로운 부서장이 왔습니다. 그 부서장은 이 사람의 공을 가로채고, 회의 때마다 그를 은근히 깎아내렸습니다. 그것이 몇 달간 반복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았습니다. 꾹 눌렀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지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부서장이 또다시 그를 비웃는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수년간 알고 지낸 동료에게 그 부서장의 흠을 조심스럽게 흘렸습니다. 그 말은 퍼져 나갔고, 결국 부서장은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오랫동안 자신이 한 일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친절했습니다. 여전히 이웃을 도왔습니다. 여전히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친절과 선행 뒤편에는 자신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우리는 압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던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동굴 속에서, 한 번은 잠든 진영에서 였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의 부하들은 속삭였습니다. "지금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당신 손에 넘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손을 거두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내 손을 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원수를 두 번씩이나 살려 보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대한 신앙의 행위로, 성숙한 인격의 증거로 칭송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우리야를 죽입니다.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원수는 살려 보낸 그 다윗이,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전장에 나간 충신의 아내를 빼앗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충신을 전선의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하여 죽게 만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어느 교인이 이 본문을 묵상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사울을 용서한 다윗은 그것이 결국 '나를 빛내는 일'이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용서하는 관대한 다윗, 원수조차 품는 위대한 다윗,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전히 다윗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야를 죽인 다윗에게서는 그 모든 위대함이 삭제됩니다. 그 위에는 오직 그 악한 자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남습니다. 사울을 살려준 다윗 위에는 다윗의 빛이 빛나고, 우리야를 죽인 다윗 위에는 예수의 십자가만이 빛납니다.
그것이 다윗이 하나님께 쓰임받은 방식이었습니다.
인간의 성숙이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다면, 원수를 두 번 살려준 다윗은 그 이후 더욱 고결한 성자의 모습으로 나아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였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폭로합니다. 인간의 선행은 대부분 자신을 빛내는 연료로 사용됩니다. 그 선행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타인의 칭찬을 얻는 데 기여하는 동안은 놀라운 에너지로 지속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끄러움이 드러날 위기가 오면, 인간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무서우리만치 냉정해집니다. 충신 우리야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에 이르는 긴 여정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에 닿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율법을 받은 자나 양심대로 살려 한 자나,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율법을 주어도 그것으로 죄를 짓고, 양심을 주어도 그것으로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막 7:21). 행위만이 아니라 생각까지도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부터 차단된 상태를 '죽음'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상태입니다 (창 6:3). 에스겔은 그것을 먼지 풀풀 나는 마른 뼈라 묘사했고, 바울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은 자들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쉬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어 냅니다. 도덕, 윤리, 선행, 명예, 재산, 사회적 공헌, 그것들은 모두 시체가 자신의 얼굴에 바르는 화장입니다.
실제로 인간들은 죽어서도 화장을 합니다. 관 속에 누운 시체에게도 단정한 옷을 입히고 얼굴에 화장을 시킵니다. 죽었다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까지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역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이 바로 그러합니다. 다 죽었는데, 그 죽은 시체들이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죽었는데 산 자인 척을 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의 민낯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을 죽인 것이 로마 병사들이나 노상 강도들이 아니라, 당시 가장 경건하고 율법을 열심히 지키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1년에 두 번씩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꼼꼼히 드렸으며, 안식일 규정을 지키기 위해 몇 걸음이나 걸을 수 있는지까지 따졌습니다. 그 열심이 거짓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더 나아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자들의 삶 전체를 부정해 버리신 것입니다. 자신의 처음 자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과 자신의 행위가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20년간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오직 내 집 한 채 마련하겠다는 꿈 하나로 버텨온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드디어 내일이 적금 만기일입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시아버지가 나타나 그 돈을 모두 가져갑니다. 그것은 돈을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지난 20년의 인생 자체를 부정당한 것입니다. "너의 지난 삶은 가치 없는 것이었다"는 선언을 들은 것입니다. 그 순간 그 며느리 안에서 어떤 감정이 끓어오르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바로 그 감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소위 '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인간 실존의 가장 적나라한 폭로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성화'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이웃을 섬기고, 나쁜 습관을 끊고,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는 것을 신앙의 성숙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니, 때로는 더 잘합니다. 인도에도, 터키에도, 아프가니스탄에도 동일한 도덕과 윤리가 존재합니다. 종교와 인종이 다르고 문명이 달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착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요구되는 하늘의 성숙일 수 있습니까?
'성화'라는 단어는 사실 성경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입니다. 굳이 그 뜻을 풀어보면, 거룩하신 분과 방불한 자가 되는 것, 곧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죽은 시체 같은 인간이 예수가 됩니까? 그 사람이 죽은 자가 될 때입니다. 비워진 그릇이 될 때입니다. 질그릇이 될 때입니다. 그때 보배이신 예수가 그 안에 담겨 연합의 상태를 이룹니다. 그것이 성화입니다. 더 훌륭해지는 것이 성화가 아니라, 더 비워지는 것이 성화입니다.
오늘날 성화는 거꾸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예수의 의를 덜 의지해도 될 만큼 기특한 사람이 되어 가느냐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변화는 세상의 모범생이 되는 방향이 아니라, 예수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로 점점 더 밀려 내려가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올바른 자기 인식과 올바른 하나님 인식이 생겨날 때, 그때 비로소 진짜 헌금이, 진짜 섬김이, 진짜 구제가, 진짜 예배가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율법의 본뜻을 풀어 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마 5:22). 실제로 피를 흘려야만 살인이 아니라, 형제를 향한 분노 자체가 이미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시점은 언제였습니까? 돌을 들어 아벨을 내리친 그 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이 분하여 낯빛이 변하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창 4:5). 가인의 분노는 표면적으로는 아벨을 향했지만, 그 뿌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인정해 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아벨을 죽인 것은 사실 하나님을 죽이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물을 드리러 오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놓고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오라고 하십니다(마 5:23~24). 이것은 절차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 되지 않은 사람이 형제와 진심으로 화목할 수 없고, 하나님과 화목 되지 않은 사람의 예배는 인간적 행위로 하나님께 뇌물 칠을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선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제사 전체를 무효로 만들어 버리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위한 몽학선생이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자신이 도저히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자임을 알고, 그래서 예수께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자를 성경은 '죽은 자'라 하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없는 자, 죽은 자'라고 고백하는 자를 '산 자'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외친 말이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베드로가 기적을 목격한 후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한 말이 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사도 요한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의 반응이 있습니다.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 1:17).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합당한 반응은 '나는 죽은 자 맞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아무도 그 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난 율법 지켰다, 난 제사 지냈다, 난 할례 받았다"며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데 열을 올리다가, 자신들의 열심을 인정해 주지 않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 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반면 성령을 받아 살아난 자들의 입에서는 이런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맞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동안 제가 내어 놓은 모든 것이 배설물입니다. 저에게 예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산 자는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죽은 자는 '왜 나를 죽었다고 하느냐'며 하나님을 향해 돌을 드는 것입니다.
이 역사의 종착역은 모든 만물이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골고다에 섰고, 이 역사는 그래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열심이 번복시킬 수 없는, 이미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이 역사가 잠시 펼쳐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어줍지 않게 하나님 앞에서 산 자인 척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선행으로, 자신의 열심으로, 자신의 도덕으로 화장을 고치는 일을 멈추십시오. 그 대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여, 제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그 항복이 진짜 열매의 시작입니다. 그 고백에서 진짜 헌금이, 진짜 섬김이, 진짜 예배가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비운 자들을 통해 당신의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예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도 될 만큼 훌륭해져 가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의 의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자임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 성도로 사는 것의 전부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 선언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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