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1~4)
병실 침대에 누운 노인이 있었습니다. 대장암과 유방암, 거기에 신장까지 무너진 몸으로 그는 매일 밤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문병을 갔을 때 그가 한 첫마디는 이랬습니다. "목사님, 단 한 순간만이라도 고통이 멈춰주면 살 것 같은데요. 침 한 번 삼킬 동안도 멈추지를 않네요." 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확신에 차서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니"를 외쳤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짜 고통 앞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벌거벗음이었습니다. "목사님, 제 안에서 나오는 것 중에 죄 아닌 게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예수님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사람이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목사님은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평생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신앙고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것, 무너지면 무너졌다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무너진 자리에서 "그래도 예수"라고 붙드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화였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아십니까? 두 딸에게 배신당하고, 재산과 권력을 다 잃고, 결국 사랑했던 막내딸마저 잃은 늙은 왕이 폭풍우 치는 벌판을 헤매며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폭풍아 쳐라, 내 뺨을 찢어라! 번개야, 이 흰 머리를 태워버려라!" 모든 것을 가졌던 왕이 모든 것을 잃고 미쳐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비극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희곡에서 이상한 지점을 발견합니다. 리어왕이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이성마저 잃어가는 그 순간에, 그는 난생처음 진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처지가 보이고, 자신을 둘러쌌던 아첨과 거짓이 보이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존경받으며 사는 인생이 '좋은 인생'이고, 배신당하고 병들고 가난해지는 인생은 '나쁜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리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고난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을 받은 우리의 삶은, 리어왕처럼 다 비극이란 말인가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이런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근사한 호텔 앞에 세단이 서자 벨보이가 달려와 문을 활짝 열어주며 깍듯이 인사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그 사람의 표정에 잔잔한 만족감이 번집니다. 반면 그 뒤에 낡고 작은 차 한 대가 서자, 벨보이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손짓으로 "저기 아무 데나 대세요" 합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얼굴에 울화가 스칩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대접받을 때는 평화롭고 무시당할 때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여기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한시적인 것'을 붙들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벨보이의 미소, 사람들의 칭찬, 통장의 잔고, 자식의 성적표, 남들의 인정, 이런 것들이 붙어 있을 때 우리는 평화롭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떨어져 나가면 마치 내가 죽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백 년 전 세계 최고 권력자였던 사람도, 백 년 후엔 무덤 속 흙입니다. 오늘 아무리 큰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도 언젠가는 그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합니다. 우리를 규정해주던 그 모든 것들은 다 흘러가고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 위에 세운 평화는, 애초에 진짜 평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옛 성전에는 특별한 구조가 있었습니다. 동쪽 끝에서 지성소가 있는 서쪽 끝으로 들어갈수록, 문은 점점 좁아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지성소 앞에는 문조차 없습니다. 오직 휘장 하나가 드리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양의 문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제물 된 양이 죽으러 들어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옛 자아, 우리가 그토록 붙들고 살아온 그 모든 자격과 조건들은 하나씩 벗겨져 나갑니다. 문이 좁아지는 것은 우리를 옥죄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안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거짓 자아를 걷어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찢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찢어진 휘장이 곧 그의 육체라고 말합니다(히 10:19-20). 그렇게 찢겨서, 하나님과 우리가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인생 속에서 하나씩 무언가를 잃어갈 때, 즉 건강을, 관계를, 재산을, 명예를, 그것을 단순히 '불행'이라 이름 붙이기 전에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이것이, 내 안에 덕지덕지 붙어 나를 규정하던 거짓 이름들을 하나님이 떼어내시는 과정은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해보십시오. 한 아이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상처가 곪아 들어가는데도 아이는 아빠에게 아프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울면 안 돼, 씩씩해야 해"라는 말을 늘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이불 속에 들어가 혼자 눈물을 삼킵니다. 이런 부모가 있다면 우리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부모를 두고 "참 훌륭한 부모"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힘들어도 힘들다 말 못 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원래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아야지"라며 억지웃음을 짓습니다. 자녀를 잃고도, 사업이 망해도, "주신 분도 하나님, 거두신 분도 하나님"이라며 애써 태연한 척 연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숙은 그런 연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국은 이 어린아이들과 같지 않으면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기가 되어야 합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없으면 달라고, 무섭다면 무섭다고 솔직하게 매달리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아들의 목숨이 위태롭자 그는 태연한 척하지 않고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응답이 없을 때에도, 그는 비로소 "아, 아버지는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선한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가시는구나" 하며 진짜로 내려놓았습니다. 괜찮은 척 위장하다가, 정말 응답이 없으면 평생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아프다고 외치고, 솔직하게 매달리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무엇이 진짜 현실인가요?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아픔, 이 불안, 이 절망, 이것이 진짜 현실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너는 화평한 자다, 안식하는 자다" 하고 선언하는 그 말씀이 진짜 현실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고 선언한 직후, 3절에서 곧바로 환난 이야기를 꺼냅니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문장이 사실은 하나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누리는 화평은, 오늘 겪는 환난이 사라져야 얻어지는 화평이 아닙니다. 환난이 있어도 그 밑바닥에 이미 놓여 있는 화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미 세워진 화평, 그것은 오늘의 감정이나 상황이 어떠하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거짓 평화인 사람들의 인정, 건강, 재산, 성취가 하나씩 벗겨지는 그 아픈 과정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평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병실의 그 노인은 며칠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까지 고통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마지막 고백은 지금도 그 목사님의 마음에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사람이었어요." 이것은 패배자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생 쌓아온 자기 신앙의 껍데기가 다 벗겨진 자리에서, 마침내 붙들 것은 오직 예수 하나뿐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리어왕이 폭풍 속에서 비로소 진실을 본 것처럼, 그 노인도 고통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진짜 평화가 무엇인지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크고 작은 폭풍이 있습니다. 그 폭풍 속에서 우리가 붙들고 있던 거짓 이름들인 성공한 나, 인정받는 나, 건강한 나, 흠 없는 나는, 하나씩 벗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묻게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그 질문 앞에 설 때, 성경은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시는 자,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화평 안에 있는 자라고 답을 줍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겪는 그 어떤 환난보다 더 확실한, 더 오래된, 더 흔들리지 않는 진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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