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로마서 2:12~16)
1945년 7월 16일 새벽, 뉴멕시코 사막의 하늘이 인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원자탄 실험이 성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폭발을 지켜보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힌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이제 나는 죽음이 되었다.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원자탄을 만든 이유는 파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히틀러를 막으려 했습니다. 인류를 구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선한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폭탄은 히틀러에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하늘에서 터졌고, 단 이틀 만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그 후로 죽는 날까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신이시여, 제가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무기에 반대하는 핵무기 반대 운동가로 여생을 보냈지만, 역설적으로 핵무기는 그 이후 세계 곳곳에서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신학자 자크 엘룰은 바로 이 아이러니를 꿰뚫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악한 것보다 자기의 선 때문에 더 악해질 수 있다." 왜 인간의 선한 의도는 이토록 자주 지옥을 만들어 냅니까? 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열망이 더 큰 파괴로 끝납니까? 오늘 로마서 2장은 그 질문의 뿌리를 건드립니다.
그 뿌리를 찾아가면 한 동산에 이르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라 하셨습니다.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금지는 동산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는 표지판이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께 의존하여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하게 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6절의 장면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바라보는 순간, 판단의 주체가 조용히 바뀌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먹음직하고, 내가 보기에 보암직하고, 나를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망이 먼저 발언권을 쥐었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이기적인 존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기적이었습니다. 선악과는 그 사실을 폭로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류 전체에게 흐르는 불치병의 이름, '자기애'입니다. 이 자기애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한 것으로 변환시킵니다. 진통제도 자기 쾌락의 욕망을 통과하면 마약이 됩니다. 훌륭한 예술도 정욕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오펜하이머의 물리학도, 히틀러를 막겠다는 선한 의지도, 결국 자기 손에서 버섯구름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선도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되지 않으면 결국 악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에덴의 선악과가 한 사람의 자기애를 폭로했다면, 율법은 한 민족의 자기애를 폭로하는 더 정교한 리트머스 시험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에덴의 아담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율법을 보는 순간, '내가 보기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는 자기애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지키기만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 됨을 쟁취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불가능함을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자신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도구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학교에 시험이 주어졌습니다. 선생님이 그 시험지를 나눠 준 이유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그 시험지를 받는 순간, 어떻게든 높은 점수를 받아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시험지의 목적은 사라지고, 시험지는 자기 자랑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율법 앞에서 한 일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율법의 요구 수준은 '항상'이며 '전부'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온갖 일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습니다. 단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 범한 것이 됩니다(약 2:10). 100점이 아니면 아예 낙제입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이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인간이 결코 통과할 수 없는 문이었습니다. 그 문 앞에 서서 인간이 배워야 할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무력함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날카롭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를 차지하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넓은 경문을 이마에 달고, 긴 옷술을 두르고, 시장에서 사람들의 문안을 받으며 '랍비'라 불리는 것을 즐겼습니다.
낮아지게 하려고 주신 율법을 자기를 높이는 사다리로 삼은 것입니다. 무력함을 드러내도록 주어진 것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무대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2천 년 전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반복됩니다. 새벽 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 성경을 몇 번 통독했다는 것, 헌금을 얼마나 드렸다는 것이 자신의 영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훈장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율법을 상석에 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은 그 새벽 기도와 통독과 헌금이 인간을 낮은 자리로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도 제대로 못 하는 자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고백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주님이 마태복음 22장에서 직접 요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만 향하던 사랑의 과녁을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돌려내는 것입니다. 율법은 자기애를 공고히 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애를 뽑아내는 수술 도구였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법도 주지 않은 채 심판한다는 것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양심이 있다고 답합니다. 양심은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송사하고 변명하며 율법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날 저녁, 회사원 한 씨가 지하철을 타려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노숙인 한 명을 보았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양심이 소리를 쳤습니다. '저 사람을 도와야 해.' 한 씨는 잠깐 망설이다가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오늘 좋은 일을 했어.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는데 나는 달랐어.' 지하철을 타고 앉아 스마트폰을 열었습니다. SNS에 '오늘 노숙인을 도왔다'는 글을 올릴까 잠깐 고민했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작동 방식입니다. 양심은 도움을 권고했지만, 그 도움의 양과 방식은 자기애가 결정했습니다. 자기에게 큰 손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가책을 지우기에 충분한 정도만 했습니다. 그리고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칭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양심이 선악과의 나무를 보고 '먹음직하다'고 판단한 셈입니다.
이것이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딤전 4:2).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하나님께 맡겨야 할 선악 판단을 스스로 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 기원부터 자기애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양심을 따라 열심히 산다고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 역시 율법처럼 그 당사자를 심판과 멸망으로 안내합니다.
반면 선한 양심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 3장 21절은 선한 양심을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자기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내려놓고, 성령에 이끌려 하나님께 의존하는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결국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의 양심은 아무리 정교하고 고결해 보여도, 결국 자기애라는 법정에서 자기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자기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구조를 반복합니다.
그 모든 위장은 한 자리에서 낱낱이 드러납니다. 바울은 로마서 2장 16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는 날, 인간의 모든 선행, 모든 양심, 모든 종교적 성취는 빛을 잃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서 자신의 어떤 행위를 내밀어도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행위만이 선명하게 남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골고다 언덕의 두 강도입니다. 십자가 양쪽에 달린 그들은 모두 강도였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이 한 명 있고 진짜 나쁜 사람이 한 명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둘 다 남의 것을 빼앗아 살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모든 인류의 초상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끊임없이 남의 것을 탈취하며 살아온 강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강도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영원히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습니다. 한 강도에게 은혜가 임하자 그의 입에서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달리 방법이 없음을 그가 안 것입니다. 자기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자기의 선이 자기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반면 다른 강도는 끝까지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부터 구원해 봐라."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긍휼을 구하는 것보다 자기 체면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창조 질서 속에도 새겨 두셨습니다. 지구상의 포유류 중 유독 인간의 아이만 태어나면서 어미의 젖으로 스스로 달려가지 못합니다. 소도, 말도, 고양이도 태어나자마자 새끼가 어미의 젖으로 기어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아이는 어미가 안아서 젖을 물려주지 않으면 굶어 죽습니다. 미숙아로 세상에 나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창조 질서 자체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숙과 변화는 인간이 쌓아 소유할 수 있는 성취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들이닥쳐 접촉점을 이루는 순간에만 가능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는 문명을 이룬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부모의 사랑과 감탄이라고 합니다. 아이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감탄하고 사랑을 부어주는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가, 똑같이 다음 세대에 사랑과 감탄을 내려 보낸다는 것입니다. 어미의 사랑과 감탄의 젖을 먹고 자란 인간이 이 세상에 이런 문명을 만들었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먹고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룰 그 나라는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비유가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균형을 잡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걷고 싶었지만 자주 넘어지며 주변의 담벼락을 긁고 남의 차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 나라의 왕이자 세계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동네에 공포했습니다. "내 아이가 선천적 장애로 인해 훼손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내 아이에게 죄를 묻지 마시고 나에게 청구하십시오."
이것이 성도의 구원의 현실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장애를 고침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의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롬 3:24~25). 그것을 아는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창피하다며 스스로 똑바로 걷는 연습에 몰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은혜에 두 손 들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새 몸이 주어질 것이고, 그때는 저절로 똑바로 걷게 됩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아들의 성취가 아닙니다. 아들의 감사와 신뢰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아들 앞에서, 다른 이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차별하던 눈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나'가 가장 심각한 강도였음을 알게 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강도들을 손가락질하며 서지 않게 됩니다.
로마서 2장 12절은 냉혹한 현실을 선언합니다.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망하고, 율법이 없는 자는 양심으로 망합니다. 인간은 율법이 있어도 없어도 다 망합니다. 율법도, 양심도, 그 어떤 인간의 선도 인간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인간이 그것으로 자기를 구원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대할 때, 가장 먼저 가야 할 자리는 "어떻게든 지켜보겠다"는 의지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 명령 앞에서 무력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자리로 먼저 내려가는 것입니다. 두 강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며 조롱하는 강도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달리 방법이 없음을 알고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무릎 꿇을 것인지를 말입니다.
자아를 향해 있는 그 지독한 자기애, 자율성에의 욕구, 스스로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심판 대상임을 잊지 마십시오.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통곡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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