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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기독교 - 그 사랑의 크기를 아는 사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1862년 조선. 변 사또의 생일잔치가 한창이었습니다. 술과 음식이 넘쳐흘렀고 기생들의 노랫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잔칫상 한켠에 누더기를 걸친 한 사내가 조용히 붓을 들어 종이에 시 한 수를 써 내려갔습니다. "황금 잔의 맑은 술은 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흐를 때 백성 눈물 흐르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구나."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챈 사람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무슨 소린지 관심조차 두지 않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포박되었습니다. 어사 이몽룡의 출두였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쉼 없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성경을 수십 번 읽고 구절을 암송해도, 그 진의를 모른다면 모르는 것만 못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성경 구절일 것입니다.

어느 절 입구에서도, 어느 경기장 응원석에서도 이 구절을 적은 팻말을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복음전도자 무어 하우스는 시카고 무디교회에서 이 한 절만 가지고 두 달을 설교했습니다. 그만큼 이 짧은 문장 안에는 깊고 심오한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오늘 이 글은 그 이해를 향한 하나의 초대입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눈에 걸리는 단어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이 누구를 가리키느냐를 놓고, 수백 년 동안 신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한쪽에서는 말합니다. "봐라,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결국 모든 인간은 구원받게 될 것이다." 보편구원론이라 불리는 이 주장의 논리는 단순하고 매력적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가 만든 인간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을 보고만 계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다른 쪽에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두를 위해 아들을 죽이셨다. 이제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믿고 안 믿고는 인간의 선택이다." 알미니안주의라 불리는 이 주장도 꽤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런데 이 두 주장을 성경 앞에 세워 놓으면, 곧 균열이 드러납니다.

보편구원론에 먼저 물어보면, 만약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해 전 인류의 죄 값을 모두 치르셨다면, 지옥은 왜 존재하는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지옥 자식"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셨고(마23:15),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자와 불꽃 가운데 고통받는 자를 나란히 묘사하셨습니다(눅16장). 성경은 지옥의 존재를 결코 비유나 상징으로만 처리하지 않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아들이 가게에 오랫동안 갚지 못한 외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외상을 모두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아버지에게도 받고 나중에 아들에게도 다시 그 값을 요구한다면, 그 가게 주인은 부당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이미 모든 죄 값을 치르셨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또다시 지옥의 형벌을 요구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집니다. 보편구원론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공의를 버립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셈입니다.

알미니안주의에는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전 인류를 위해 아들을 죽이셨는데, 만약 아무도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은 아무 이유 없이 돌아가신 것이 되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선택에 따라 구원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면,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얻어낸 정당한 대가가 됩니다. 과연 그것을 은혜라 부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세상'은 무엇인가? 신약 성경에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185회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105번이 요한의 글에 나옵니다. 요한은 이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타락한 인류 전체를 가리킬 때이고, 다른 하나는 그 타락한 세상에서 건짐을 받은 무리를 가리킬 때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친히 이 경계를 그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요17:9)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예수님의 기도와 관심은 세상 전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어떤 한 무리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대상의 범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가에 있습니다. 원래는 세상과 다를 바 없던 자들을, 세상 가운데서 건지셔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건짐을 받은 무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인가?
'이처럼'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을 알려면, 16절보다 먼저 14절과 15절을 읽어야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절의 '이처럼'은 바로 이 두 절을 받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민수기 21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길이 고달프다며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끊임없이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변변한 음식도 없고 물도 없다."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셨고, 뱀에게 물린 자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달려왔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이 처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뱀에 물렸을 때 쓰는 나름의 민간 처방들이 있었습니다. 술이나 고약으로 독을 빼내는 방법들입니다. 게다가 놋뱀을 쳐다본다고 독이 사라진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설령 시도해 보고 싶어도, 이스라엘 사람에게 뱀은 에덴의 유혹자, 죄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놋은 심판을 뜻했습니다. 장대 위의 놋뱀은 저주받은 심판받은 자의 형상이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장대 위의 뱀이 골고다의 십자가를 미리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압니다. 신명기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5:21) 죄 없으신 예수께서 저주받은 뱀이 되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온몸으로 받으셨습니다. 그 저주받은 분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구원인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단 1퍼센트도 보탤 수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놋뱀 사건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잘못된 구원의 처방들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첫 번째 처방: 선행으로 독을 빼내라. 헌금을 많이 하면, 봉사를 열심히 하면, 금식하면 죄가 상쇄된다고 가르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처방으로 살아난 자를 단 한 명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뱀독은 그런 것으로 해독되지 않습니다. 약국에서 파는 해열제로 폐렴을 고칠 수 없는 것처럼, 도덕적 노력은 죄의 증상을 잠시 다독일 수는 있어도 죄 자체를 없애지 못합니다.

두 번째 처방: 앞으로 잘 살겠다고 결단하라. 이미 물린 사람이 "이제부터는 절대 원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해도, 몸에 퍼진 독은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과거의 죄는 미래의 선행으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3:15) 외상값을 갚지 않은 채 "앞으로는 꼬박꼬박 내겠습니다"는 말만으로는 가게 주인의 마음이 풀리지 않는 법입니다.

세 번째 처방: 사회를 개혁하라. 불뱀에 물린 자들에게 하나님은 불뱀과 싸워 없애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면 죄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는 아름답지만 착각입니다.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그 순간에도 독은 계속 퍼져갑니다. 물론 성도는 이웃을 섬기고 불의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복음 없는 사회참여가 지상천국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네 번째 처방: 신성한 물건을 지녀라. 이스라엘 백성은 히스기야 왕 때까지 모세가 만든 그 놋뱀에 분향했습니다(왕하18:4).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물건을 붙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 목걸이를 하면 왠지 더 거룩해지는 기분이 든다거나, 자동차에 성경을 두면 사고가 안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부적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 역사합니다. 그 의미를 모른 채 지니고 다니는 십자가는 목에 걸린 장신구일 뿐입니다.

다섯 번째 처방: 더 열심히 기도하라. 기도는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원에서, 부흥회에서 십자가를 붙들고 더 세게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 된다는 생각은 믿음이 아니라 주술입니다. 놋뱀에 대고 기도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 처방의 공통된 오류는 하나입니다. 질병의 근원을 치료하지 않고 증상만 다스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폐렴이 진행되는 동안 해열제와 진통제만 삼키면 그 순간은 편해지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더 깊이 쓰러집니다. 죄의 근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해결됩니다.

칼빈주의 오대 강령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을 그들의 공로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창세전에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선택된 자들은 스스로 구원을 요청하거나 선택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렇게 부름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반드시 구원의 완성에 이릅니다.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이 다섯 교리는 차가운 신학 용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나의 뜨거운 고백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씁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명분만 분명하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등지고 집을 떠나 오랫동안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아직 아들이 멀리 있을 때부터 달려 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무언가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미리 기대하고 매일 그 길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조건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원수였을 때, 이미 시작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나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유는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복된 소식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특별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보태지 않았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 공로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붙드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수였던 자신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향해서도 그 사랑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회 참여의 출발점입니다. 빛과 소금과 향기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비천하고 타락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변 사또의 잔치 자리에서 이몽룡의 시를 알아듣고 자리를 피한 사람들이 살아났듯이,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듣는 자는 삽니다. 단지 사후에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율법이 아닌 은혜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사랑의 크기를 아는 사람의 삶은 다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