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이야기

새 언약(3) -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구원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2.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에스겔 36:22,26)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의 연대기입니다. 약속의 땅을 받았으나 그 땅을 더럽혔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렸으나 그 이름을 욕되게 했습니다. 에스겔은 그 실패를 낱낱이 기록합니다.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피를 흘리고, 언약의 땅 자체를 오염시킨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포로였습니다. 바벨론의 군화 아래 짓밟혀, 낯선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끌려간 그 땅에서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방인들이 비웃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들이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그런데 왜 여호와의 땅에서 쫓겨났지?" 고대 세계에서 전쟁의 승패는 신들의 능력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패배했다는 것은 여호와가 졌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죄로 포로가 되었으면서, 그 포로 된 상태로 하나님의 이름까지 더럽혔습니다. 이중의 배반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을까요? 무능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 이미 우상을 섬기면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포로 됨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거였습니다.

이 역설을 꿰뚫어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룻입니다. 그녀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혈연도, 문화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가정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룻은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습니다. 시아버지도, 시동생도 죽었습니다.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따라오지 마라. 나에게는 너희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르바는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룻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흉년에도 치시고, 죽음으로도 치시는 하나님, 그러나 바로 그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치시는 하나님이라면, 회복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룻은 자기 백성과 신들을 버리고 언약의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도할 때 주로 성공 이야기만 꺼냅니다.
"예수 믿고 사업이 잘됐다, 병이 나았다, 가정이 회복됐다." 물론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양 이야기하면, 룻이 보았던 것과는 다른 하나님을 전하는 셈이 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치시는 하나님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을 위해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보여줄 때, 비로소 참된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에스겔 36장 22절에서 하나님은 선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이 말씀은 냉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근원적인 위로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이었다면, 이스라엘이 충분히 선하지 않았을 때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구원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한 구원이라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자격이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이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구원의 내용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맑은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시고, 새 영을 부어주시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는 율법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받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에 새긴 율법은 결코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새 언약은 그 마음 자체를 교체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간 원인을 자기반성을 통해 분석했습니다. 결론은 단순했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바리새 운동이었습니다. 율법을 더 철저하게, 더 세밀하게, 더 빠짐없이 지키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름의 진지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지함은 방향이 틀렸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질이었기 때문입니다. 돌 같은 마음으로 율법을 더 많이 지키려 할수록, 결국 율법은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나는 이것을 지켰다"는 자기 의의 외투를 두껍게 입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기능을 몰랐습니다. 율법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드디어 메시아가 왔습니다.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부어주실 분이 왔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약속한 새 언약의 완성자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것이 바로 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약을 가장 잘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그 언약의 완성자를 죽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악함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전한 폭로입니다. 율법의 기능을 따라 끝까지 밀고 가면, 자기 의로 충만해진 인간이 어떤 결말에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끌어안으신 그 분을 죽이는 것, 그것이 자기 의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를 채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가능성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노력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내가 율법을 잘 지키면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 내가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 이 모든 것에 대한 죽음입니다.

에스겔 36장의 끝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구원받은 자의 첫 반응이 도덕적 개선이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자기 혐오와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일방적인지를 볼 때,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비로소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유명한 예를 들어보면,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먼 발치에서 보고 달려가 안아주었을 때, 그 아들이 느꼈을 감정은 무엇이었겠는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순간, 자신이 준비해온 말이 얼마나 초라한지,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얼마나 가증한지가 더 깊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용서가 클수록 자기 죄의 무게도 더 선명해집니다. 이것이 새 언약 안에서의 회개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회개입니다.

새 언약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내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새 마음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