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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기독교 - 성찬이란 무엇인가, 성찬의 참 의미와 영적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어떤 사람이 매일 새벽, 집을 나서기 전에 아이들의 방문을 조용히 엽니다. 이불을 걷어차 버린 녀석이 있으면 소리 없이 덮어주고, 그 잠든 얼굴을 한참 들여다봅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얼굴이 왜 그리 좋은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차오릅니다. 그러다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현관문을 나서면, 이상하게 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바냐 3장을 읽다가 그만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표준새번역) 아, 하나님도 그를 그렇게 보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이유 없이 기뻐하듯, 하나님도 그를 그렇게 바라보며 기뻐 노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순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성찬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상입니다. 성찬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 조그만 떡 한 조각과 한 모금의 포도주 안에서 우리를 향해 노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신학에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전달하시는 통로, 즉 말씀과 기도와 성례입니다. 그 성례 안에 세례와 성찬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찬과 세례는 사실 말씀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가시적 말씀"이라 불렀습니다. 귀로 듣는 것이 설교라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맛보는 것이 성례입니다. 같은 복음인데, 전달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진실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아이를 꼭 껴안아 줄 때, 그 사랑은 말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성찬은 그런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진리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하나님의 포옹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가 축성기도를 올리면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를
'실체변화'라 공식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축성 후에도 빵은 여전히 빵의 맛이 나고, 포도주는 여전히 포도주의 향이 납니다. 만약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살과 피라면, 성찬 중에 잔을 쏟았을 때, 혹은 떡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어찌해야 합니까? 이 물음 앞에서 그 교리는 억지스러워집니다.

성찬이 중요한 이유는 그 빵이 예수님의 살로 변해서가 아닙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진 그 사건, 그 복음을 기억하고 확인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성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조금씩 축적하여 구원을 완성해 가는 의식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구원을 기억하고, 그 은혜로 주어진 내 신분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드리면 크게 불려 주신다." 혹은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도 채워주신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이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성찬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요한이 그 사건의 배경을 얼마나 세심하게 배치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기록합니다(요 6:1). 굳이 '디베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그 호수가 세상 권세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바다는 어둠과 심판과 죄를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 바다가 없겠고"라고 기록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다를 건너 산으로 오르십니다. 산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곳입니다. 시내산, 호렙산, 시온산, 모리아산이 모두 그러합니다. 세상의 바다를 건너, 영광의 산 위에서 군중을 먹이시는 이 장면은 하나의 신학적 선언입니다. 성찬은 세상을 건넌 자들, 즉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현장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마가는 더 구체적으로 "푸른 잔디"라고 씁니다. 왜 굳이 잔디와 풀입니까? 목자와 양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23편의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가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예수님은 이 군중을 먹이시기 전에 이미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그 초록빛 배경으로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한은 이 기적 직전에 한 마디를 삽입합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요 6:4)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이 살아난 날입니다. 애굽의 장자들과 함께 죽어야 할 그들이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로 인해 살아남은 날입니다. 요한은 지금 오병이어 사건이 단순한 먹이심의 기적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떡을 나눠주시는 방식에서도 확인됩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요 6:11). 이 동작은 최후의 만찬에서 그대로 반복됩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마 26:26). 떡을 취하시고, 축사하시고, 나눠주십니다. 동일한 몸짓입니다. 오병이어는 성찬의 예고편이었던 것입니다.

사건 다음 날, 예수님은 그 의미를 직접 설명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27, 35) 오병이어의 주제는 오직 하나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헌신하면 크게 불려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그 생명의 결핍을 자기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채우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처음 보았을 때 한 말이 그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만""이게 뭐야?"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기는 한데, 솔직히 썩 먹음직스럽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에서는 고기도 먹고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었는데, 지금 우리 눈앞에는 이 만나밖에 없구나."

오늘 성찬 상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작은 잔, 시큼한 포도주, 누룩도 없는 밍밍한 떡. 솔직히 말하면 초라합니다. 여기에 갈비찜이나 생선구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의 본심 아닐까요?

그런데 바로 그 생각이, 아직 성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성찬 상의 떡과 포도주는 맛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담겨 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복음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만나는
"이게 뭐야?"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광야에서 죽는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 만나는 생명 자체입니다.

여기서 물음이 생깁니다. 복음과 아무 상관없는 진수성찬을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이 초라해 보이는 성찬 상을 택하겠습니까? 힘과 성공의 원리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화려하게 사는 삶을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원리로 살되 종종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삶을 택하겠습니까?

성찬을 받는 사람들은 후자를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찬식은 그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목적지가 이 땅이 아님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생존에 필요한 만큼을 주님께 구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재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군중은 흥분했습니다.
"이분이라면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겠다."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요 6:15). 로마의 압제 아래서 배고팠던 군중에게, 오천 명을 먹이신 분은 이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피해 홀로 산으로 떠나가십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원하는 왕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땅의 왕을 원했고,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들은 보리떡을 더 원했고,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도 반복됩니다. 예배당 안에 앉아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자기 소원을 들어줄 도구로 사용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이 잘 되길 원해서, 병이 낫기를 원해서,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길 원해서 주님을 찾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 소원이 채워지지 않으면 예배당을 떠납니다. 혹은 떠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원망이 쌓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지금도 홀로 산으로 떠나가십니다. 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성찬은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성찬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그 생명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자신의 전부인 사람들의 잔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호숫가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고 지친 그들에게 숯불 위에 구운 생선과 떡을 내어주십니다. 오병이어의 현장과 꼭 같은 장면입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묻고, 세 번을 부탁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것은 양들의 배를 채워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성찬의 의미를 아는 자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은 베드로의 미래를 이야기하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두 팔을 벌린다는 것은 십자가의 자세입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가는 삶,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 그것이 성찬을 드는 사람의 삶입니다.

어느 병사가 전쟁터에서 보급품을 받습니다. 화려한 음식은 없습니다. 딱딱한 건빵과 통조림뿐입니다. 그러나 그 병사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없으면 싸울 수 없고, 그것이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러합니다. 세상이 보기엔 초라하지만,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것은 생명을 이어가는 보급입니다.

성찬을 받는 사람들은 그 보잘것없는 보급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주는 화려한 진수성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위에 세워진 이 작은 상에서 참 만족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만족으로, 두 팔을 벌린 채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찬의 자리에는 한 가지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의사와 청소부가 같은 떡을 먹습니다. 교수와 학생이 같은 잔을 마십니다. 재벌 회장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같은 상에 앉습니다. 세상의 계급과 서열이 그 상 앞에서 사라집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스스로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을 얻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들 모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찬을 드는 사람들은 빈부와 지위로 서로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상대를 재단하지 않습니다. 그 상 앞에서 우리는 모두 구원받은 죄인이고, 목자의 은혜로 먹임 받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성찬 안에는 구원론이 있고, 교회론이 있고, 신론이 있고, 인간론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분이 무엇을 하셨으며, 그로 인해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그 작은 떡 한 조각과 한 모금의 포도주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을 눈에 보이는 복음이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 상 앞에 앉을 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뻐 노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살아남은 이스라엘을 기억하십시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며 양 떼를 이끄신 목자를 기억하십시오.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게 될 만찬을 기대하십시오. 그 기억과 기대 사이에서, 오늘 이 성찬 상은 우리를 위해 차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