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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 천국은 사은품이 아니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9.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복음 12:13~21)

어느 해 가을, 한 남자가 서울 한복판의 고급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아시아 전역에서 이름이 알려진 한류 스타였습니다. 일본 공항에 내리면 수천 명의 팬들이 몰려들었고, 국내에 몇 대 없는 고급 외제차를 몰았으며, 수첩에는 콘서트와 드라마 출연 일정이 빼곡하게 잡혀 있었습니다. 부고 기사 아래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추모하는 말들 사이사이에 이런 자조적인 문장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 아파트 하나 사려면 저는 죽을 때까지 월급을 한 푼도 안 써도 모자랍니다. 그런 분이 경제적 이유로 세상을 떠나신다면, 저는 벌써 죽었어야 하지 않나요?"

표면적 원인은 사업 실패와 사기였습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그토록 풍요로운 현실을 가진 사람이 왜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결핍감에 시달렸을까요? 그가 살던 세계는 보통 사람들이 로망이라 부르기조차 황송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끝내 그 현실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도가 덮치던 날, 독일의 한 기업가가 기차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 재산이 이제 3천만 달러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망했다."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만져 볼 수 없는 액수를 손에 쥔 채, 그는 '망했다'고 느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인간의 결핍이 절대적 크기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문제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지금의
'나'를 티코로 인식하고, 되고 싶은 '나'의 자리에는 벤츠를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달립니다. 자신의 처지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그 달음박질은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달음박질 전체를 가리켜 한 단어로 부릅니다. 탐심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탐심을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탐심은 훨씬 더 광대하고 무겁습니다. 어린아이가 놀이터에서 친구의 장난감을 빼앗으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을 탐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보다 훨씬 앞선 자리를 탐심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실 앞에서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 피조물임을 인정하기 싫어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충동, 그 충동 자체가 탐심입니다.

에베소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여기서 '원하다'로 번역된 헬라어가 에피뒤미아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예수님의 입에서도 나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예수님의 '원함'은 순전한 사랑이요 하나님의 뜻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단어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에는 탐심, 곧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인간의 모든 욕구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부릅니다. 처음 이 말을 접하면 낯섭니다. 우상 숭배라면 금송아지 앞에 절하거나 신당에 향을 피우는 일 아닌가요? 그러나 우상 숭배의 본질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삶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재물을 올려놓을 수도 있고, 명예를 올려놓을 수도 있으며, 인기를 올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뿌리에는
'나'라는 우상이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섬깁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존재가, 오직 자기 자신을 높이고 빛내기 위해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그 전체가 탐심이요 우상 숭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 하나를 마주합니다. 탐심의 범주에는 세속적인 욕망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불리고 싶어서 봉사하고, 경건하다는 평판을 얻고 싶어서 헌금하고,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고 싶어서 선행을 쌓는 것도, 그 동기가
'나'를 위한 것이라면 탐심입니다. 선한 행위의 겉모습 안에 자기 숭배가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돈과 선한 행위를 같은 문맥에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시는 도중, 한 남자가 끼어들었습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히브리 관습에 따르면 형이 3분의 2를, 아우가 3분의 1을 상속받습니다. 형이 아우의 몫마저 가로챘다면, 이 요청은 더없이 정당합니다. 당시 랍비들은 민사 분쟁의 중재자 역할도 했으니 예수님께 호소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틀린 구석이 없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탐심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주님은 그의 요청이 법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정당한 요청 안에 담긴 마음의 방향을 지적하십니다.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도, 그것이 참 생명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면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드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그의 밭에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풍작이 들었습니다. 곳간이 가득 차고도 남았습니다. 그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야겠다. 모든 것을 쌓아 두고, 영혼아 이제 평안히 쉬어라. 여러 해 쓸 것이 있으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것이 잘못입니까? 노후를 준비하고 은퇴 후의 삶을 계획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을 하지 않으려는 지혜로운 태도 아닌가요?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밤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주님의 지적은 저축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그 부자의 문제는 그가
'자기를 위하여' 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 전체가 '나'라는 중심을 향해 수렴되고 있었습니다. 큰 곳간, 풍성한 소출, 평안한 노후, 이 모든 것은 '나'의 만족을 위한 재료였습니다. 그 삶 어디에도 참 생명이신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리석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솔직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 만일 그 부자가 풍성한 소출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요?

마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입니다. 어린 나이에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유대 관원이 예수님께 달려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질문의 이면을 읽어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한 존칭이 아닙니다. 선한 분에게 선한 길을 물어, 자신이 이미 그 길을 걷고 있음을 확인받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이 질문은
'저는 이미 충분히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검증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계명들을 열거하십니다. 청년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 순간 예수님이 그를 바라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사랑하사.' 사랑의 눈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주님은 지금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어려서부터 쌓아 온 그 청년의 성화, 그 모든 선한 행위의 실체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가 율법을 지켜 온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행이라는 이름의 곳간을 쌓아 왔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사랑하셨기에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폭로가 곧 사랑이었습니다.

그 장면 다음에 베드로가 나섭니다.
"주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말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베드로 역시 부자로 선언하십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버리는 것, 그 버림도 탐심입니다. '내가 이만큼 희생했으니 이만큼 받아야 한다'는 계산이 들어 있는 한, 그 희생은 또 다른 방식의 곳간 쌓기입니다.

제자들은 탄식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이 탄식은 옳습니다. 세상 재물을 쌓는 부자도, 선한 행위를 쌓는 부자도, 희생을 쌓는 부자도 모두 구원받을 수 없다면, 이 세상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단 한 문장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성경에 탐심의 가장 솔직한 초상화가 있다면, 그것은 야곱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발꿈치를 잡는 자', 즉 빼앗는 자입니다. 그는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취했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챘으며,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소유를 늘리는 일에 모든 지혜를 쏟아부었습니다. 결혼도, 임금도, 가축도, 모든 것이 자기 것을 불려나가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야곱과 평생을 동행하셨습니다. 그가 형을 피해 도망칠 때도, 외삼촌의 집에서 고생할 때도, 심지어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때부터도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동행 속에서 한 가지를 꾸준히 하셨습니다. 야곱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얍복강 가에서 그 일이 완성됩니다. 한 사람이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밤새 씨름이 이어집니다. 날이 밝을 무렵,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 뼈를 칩니다. 뼈가 어긋납니다. 그 순간 야곱은 걸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름이 바뀝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환도 뼈가 어긋나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 어떻게 이긴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야곱은 평생 이기기 위해 살았습니다. 형보다 나아야 했고, 아버지의 축복을 차지해야 했고, 외삼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 모든 이김의 역사 속에서 그는 사실 지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우상에게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환도 뼈가 부러지고 더 이상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이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는 자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일이 이것입니다. 혼자 걷겠다는 기세를 꺾으시고, 당신이라는 지팡이 없이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입니딜. 그것이 성화입니다. 자기 힘으로 점점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는 결코 나아질 수 없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예수 안에 집어넣으시고, 예수의 환도 뼈를 십자가 위에서 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부활로 살리시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백성을 함께 살려 내셨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백화점에서 고가의 물건을 구입하면 사은품을 줍니다. 사은품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진짜 목적은 그 물건을 사는 것이고, 사은품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이렇게 삽니다.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최대한 누리며 살다가, 혹시 천국이라는 것이 있으면 그것도 챙겨 가면 좋겠다는 태도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주는 수단이고, 천국은 그 삶 끝에 덤으로 따라오는 사은품입니다.

본문의 부자 청년처럼,
'내가 이만큼 지켰으니 영생도 받을 수 있겠지요?'라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존재의 출발점이요 목적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것들은 어떻게 보여야 합니까?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배설물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것 앞에 한시적인 것이 배설물로 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것들이 배설물로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돈이 좋고, 인정이 필요하고, 칭찬이 달콤합니다. 연극하지 마십시오. 아닌 척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자리에서, 부자는 부자의 자리에서 그 실체를 처절하게 마주하십시오.
'나는 어쩌면 이렇게도 나 자신밖에 모르는가.' 그 폭로의 현장에서 도망치지 마십시오. 그 폭로의 자리가 바로 은혜가 시작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선해지려는 시도를 내려놓고, 자기 힘으로 부자가 되려는 욕망 앞에서 스스로의 민낯을 인정하며,
"나는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나를 버릴 수 없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고백을 하는 자리, 그 자리에서 예수의 은혜가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 은혜가 쌓이고 쌓이는 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그 하늘의 보화가 쌓일수록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조금씩 풀립니다. 그렇게 풀린 손에서 비로소 진짜 나눔이 나오고, 진짜 섬김이 흘러나오고, 진짜 헌금이 드려집니다.

청부론도, 청빈론도 답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부자가 되자는 것도, 일부러 가난하게 살자는 것도, 결국은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높이려는 탐심의 변형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 모든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결단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 깊이 박혀 들어올 때, 그 십자가가 '나'라는 우상을 조금씩 허물어 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예수만이 생명입니다. 예수만이 보화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 것들을 열심히 챙기며 살다가 마지막에 덤으로 받는 사은품이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가 이미 그 안에서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존재하며,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 삶 전체의 내용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사은품입니다. 아니, 사은품도 아닙니다. 야곱의 환도 뼈처럼, 우리를 넘어뜨리시기 위해 허락된 씨름의 현장일 뿐입니다. 그 씨름의 끝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지팡이 없이는 한 걸음도 걷지 못하지만, 그래서 비로소 영원히 쓰러지지 않는 사람들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