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태복음 12:38~45)
오래전 어느 철학과 강의실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로운 선택입니까?" 학생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조용히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 나라에서, 이 언어로, 이 시대에 태어난 것도 여러분의 선택입니까?" 강의실이 잠잠해졌습니다. 선택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좁은 영역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학생들은 어렴풋이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를 인간 존엄의 핵심으로 여기며 삽니다. 무엇을 먹을지, 누구와 함께할지, 어떤 일을 할지, 선택의 연속이 곧 삶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들의 맨 아래,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자리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하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의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인간은 소유에 중독되어 있다고 합니다. 돈, 명예, 권력뿐 아니라 지식도, 관계도, 심지어 신앙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아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처방을 내렸습니다. 소유 지향의 삶을 버리고 존재 지향의 삶으로 이주하라고,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합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건강한 교회의 설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기복주의를 버리고, 번영신학의 덫을 피하고, 인격을 도야하며 선행을 실천하자는 소리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프롬의 처방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 시도를 향해 단 한 마디를 던집니다. 그것도 죄라고 합니다. 왜입니까?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소유의 대상만 바꿀 뿐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부끄럽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욕망의 에너지는 고스란히 다른 방향으로 흐릅니다. 더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 더 헌신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더 깨끗하고 고결한 삶을 살았다는 자부심, 이것들이 새로운 소유의 목록이 됩니다. 어떤 스님이 무소유를 실천하면서 그 무소유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소유로 붙들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이 관심을 두는 것은 행위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 행위를 움직이는 엔진이 무엇인가입니다. 전 재산을 구제하고 몸을 불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사람 안에 귀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귀신이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예고 없이 나갔습니다. 물 없는 곳, 은혜가 없는 곳을 돌아다니며 다른 거처를 찾았지만, 가는 곳마다 이미 귀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결국 처음 살던 곳으로 돌아와 보니, 집이 말끔히 비워져 있었습니다.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었습니다. 귀신은 반색하며,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보다 더 나쁜 귀신 일곱을 불러 함께 들어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훨씬 더 비참해졌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귀신이 나가는 것도, 다시 들어오는 것도, 친구들을 데려오는 것도, 그 모든 과정에 그 사람의 의지가 개입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귀신의 행동에 의해 일이 벌어졌을 뿐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수십 년간 담배를 끊으려 했지만, 결국 금단 현상이 그를 다시 편의점 앞으로 이끌어가는 것처럼, 도박 중독자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결국 어두운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믿음은, 그 믿음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허망하게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그 집이 비고 소제된 상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도의 어느 수행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욕망을 내려놓는 수련을 했습니다. 재물 욕심을 버렸고, 명예도 버렸고, 가족도 버렸고, 나중에는 음식도 최소한으로 줄였습니다. 제자들이 그를 성자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방문객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은 무엇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수행자는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방문객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아무것도 없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수행자는 오랫동안 침묵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그 침묵 속에 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깨끗이 비워진 마음이 더 위험한 이유는, 그 비움 자체가 새로운 자랑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무아(無我)도, 참선의 몰아(沒我)도, 스스로의 힘으로 마음을 비우는 모든 시도도, 성경의 눈으로 보면 소제된 집에 일곱 귀신이 사는 형국입니다. 귀신이 들어오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비움은 다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채워짐까지를 포함합니다. 성령이 임한 자의 내면에서 세상의 욕망이 밀려 나가는 것이 참된 비움입니다. 비움이 목적이 아니라, 성령의 채움이 목적이고 그 결과로 비워지는 것입니다. 순서가 다릅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바리새인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종교 엘리트였습니다.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기도와 금식과 십일조에 있어서 흠이 없었고, 이방인들과 세리들이 빠져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의 집은 소제되어 있었습니다. 청결했습니다.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너희가 바로 일곱 귀신 들린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충격적인 이유는, 우리가 '귀신들림'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그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사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사람, 그런 이미지를 기대한다면 바리새인들은 귀신들림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신경계의 이상으로 인한 증세는 그냥 질병입니다. 그것에 항도파민제를 주사하는 것이 주님이 오신 이유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귀신들림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영광과 가치와 평판을 위해 움직이는 모든 삶의 방식이 귀신들린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경건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깊이 귀신들려 있을 수 있습니다. 소제된 집에 일곱 귀신이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장면의 발화점은 조금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말했습니다. "저자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반응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주의의 세계관 안에서 정함과 용서는 반드시 인간 편의 노력과 공로를 근거로 해야 했습니다.
저주받고 부정한 자가 깨끗해지려면 그에 걸맞은 무언가를 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용서와 회복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훼방이란, 거창한 신학적 반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무언가를 근거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은혜의 일방성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논리, 그것이 성령 훼방의 정체입니다. 왜 용서받지 못합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자신이 살려지는 것임을 아는 자에게 임합니다.
백화점을 설계하는 사람들은 소비자 심리학을 정밀하게 적용합니다. 시계를 보이지 않는 곳에 두어 시간 감각을 마비시키고, 향기와 온도와 동선을 계산하여 고객이 더 오래, 더 많이 머물도록 유도합니다. 99,900원이라는 가격표 앞에서 우리는 10만 원이 아니라 9만 원대라고 인식합니다. 스스로 합리적으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설계 안에서 움직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입니다.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마귀의 세간은 마귀의 선택을 따릅니다. 종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선택이 아닙니다. 구출입니다. 강한 자가 먼저 결박당해야 그 집의 세간을 빼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은 마귀를 결박하고 그의 세간이었던 자들을 빼내오는 사건입니다. 그 어디에도 인간 편의 공헌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세간은 자신을 구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구출된 사람의 삶은 어떻게 달라집니까? 겉으로 보면 오히려 더 고달파 보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자의 내면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기를 챙기고 싶은 욕망, 자신의 헌신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다는 자부심, 이 모든 것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스스로도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된다고 느낍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방향과 자꾸 어긋납니다.
어떤 노인 목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 좋은 가구를 만들었습니다. 은퇴할 나이가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집 한 채만 더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대충 지어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전만 못한 재료를 쓰고, 꼼꼼하지 못한 손으로 일을 마쳤습니다. 완성된 집을 넘겨주는 날, 주인은 열쇠를 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집은 당신 것입니다. 평생의 수고에 드리는 선물입니다." 목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성도는 결국 자신이 살아가는 그 삶 안에서 살게 됩니다. 대충 쌓아올린 자기 의(義)의 집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는 그 집을 허물고 더 작아지는 방향으로, 더 낮아지는 방향으로 이끌립니다. 그것이 세상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이고, 손해처럼 보이고, 어리석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자의 삶인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둡고 밀폐된 공간 안에서,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무력함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인자도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이것이 요나의 표적의 의미입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전부를 하십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나는 성숙했네, 나는 발전했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신 세리처럼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더 낮아지는 것, 더 내려가는 것, 더 벗겨지는 것, 더 털리는 것, 그것이 마귀에게서 건짐받은 자의 삶이 가리켜야 할 방향입니다. 나는 아니요, 하나님만이 전부이신 삶, 그 삶 안에서 비로소, 일곱 귀신이 다시 들어올 자리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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