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오래전 어느 청년이 밤중에 산을 올랐습니다. 삼각산 기도원의 흔들바위를 찾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기도하면 그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는 전설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믿음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캄캄한 산길을 올라 바위 앞에 서서 한참을 기도했습니다.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담당 전도사님께 여쭤보았더니,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믿음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왔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정말 그런 것입니까? 반복해서 외치면 생겨나는 것입니까? 노력으로 키워 분량을 늘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물음이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많이 오해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믿음만 있으면 못 할 것이 없다"는 교육을 받아왔고, 일이 잘못되면 어김없이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을 키우기 위해 금식기도를 하고 백일 철야를 하고 천일 새벽기도를 합니다. 이 오해의 뿌리는 단순합니다. '믿음'을 '믿다'라는 동사의 명사형, 즉 내가 수행해야 할 행위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믿음이 내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는 월급이지,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로마서 1장 17절은 믿음의 출발점을 이렇게 밝힙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義)'를 도덕적·윤리적 올바름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의는 다른 뜻을 가집니다. 관계를 맺은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역할과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끝까지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잘못해도 아버지는 아버지이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자녀가 등을 돌려도, 실망을 안겨줘도, 아버지는 끝까지 아버지의 자리를 지킵니다. 하나님의 의란 바로 그 아버지다움입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과 집념이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는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지만, 로또 당첨이나 대학 합격처럼 상대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지는 그런 소식이 아닙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복음은 이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먼저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으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살려내셨고, 그 일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우리가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진짜 '나의 복음'이 되려면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강원도에 사는 이씨의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이씨에게는 뛸 듯한 기쁨이지만, 그 소식을 함께 들은 정씨에게는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소식이 나와 관계가 있어야, 나에게 적용이 되어야 진짜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 연결고리가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마치 믿음이 두 종류인 것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아브라함의 생애만큼 좋은 교과서가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읽으며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집니다.
갈대아 우르를 먼저 떠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 전체를 이끌고 길을 나섰습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가정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명확히 밝힙니다. "너희 조상들인 데라, 아브라함, 나홀이 강 저편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 그 자신도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욥처럼 흠 없는 의인 대신 이런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셨을까요? 믿음이란 인간의 자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부터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갈대아 우르는 4천 년 전에 이미 수세식 화장실이 있던 문명 도시였습니다. 거기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디로 가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말입니다.
그러나 떠나면 큰 민족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에게 이보다 솔깃한 제안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데라는 가족을 이끌고 길을 나섰습니다. 복 받으러 떠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그 약속의 땅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고 요구한 적도 없는데, 하늘에서 먼저 내려오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출발한 데라는 끝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하란이라는 중간 도시에서 발이 묶였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문명권을 차마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데라가 죽자 하나님은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의 첫 번째 부르심에 이은 두 번째 부르심이었습니다. 75세의 아브라함은 그제야 가나안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기근이 닥쳤습니다. 아브라함은 망설임 없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라 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아름답다는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 속여 바로에게 넘겨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닮고 싶어하는 믿음의 조상의 실제 모습입니다.
잘못한 쪽은 아브라함이었지만 하나님은 바로를 징계하셨습니다. 아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질책을 감당할 만큼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그랄 왕에게 또 사라를 팔아넘겼습니다. 그때는 이삭이 사라의 배 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시고 가르치시며 끝까지 그를 끌고 가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는 결정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시면서 짐승들을 쪼개어 마주 놓게 하셨습니다. 당시 히브리 풍습에 따르면 두 당사자가 쪼갠 짐승 사이를 함께 지나가며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되겠다"고 서약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깊은 잠에 빠뜨리시고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맺어야 할 약속을 하나님 혼자 지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내가 혼자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선언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는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 방향으로 달렸던 역사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접 찢기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써, 인간 쪽에서 번번이 깨뜨린 그 약속을 하나님이 홀로 완성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다면 우리 중 누가 벌써 심판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13년의 침묵 끝에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었습니다. 사라도 장막 뒤에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금방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셨는데, 두 사람 모두 그 약속 앞에서 웃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가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웃었던 사람이 믿음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잘못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인 것입니다.
수십 년의 실패와 방황을 거친 끝에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섰습니다. 백 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 앞에서,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망설임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때 아브라함의 내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였다." 갈대아 우르의 겁쟁이 우상 숭배자가,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처음에 오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 계획, 섭리, 약속, 이 모든 것이 인간보다 먼저 움직이는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뚫고 들어와, 때로 징계하고 달래고 설득하며 우리를 빚어 갑니다. 아브라함이 실패할 때마다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 긴 과정 끝에 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인생의 온갖 굴곡을 지나면서 "아,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 분이구나. 그분을 신뢰할 때만 진짜 평안이 있구나" 하고 두 손을 드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처음 믿음이 두 번째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이 우리 안에서 믿음을 꽃피웁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증인 명단에는 기드온, 삼손, 입다처럼 흠투성이 인물들이 버젓이 올라 있습니다. 믿음은 그 사람의 자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도, 그가 대단한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두 번씩이나 남의 손에 넘긴 그 나약한 사람을,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빚어내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믿음의 첫 번째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600년경,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무너졌고 남유다도 패역이 극에 달해 있을 때였습니다. 하박국은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왜 불의한 자들은 잘 살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고난을 받습니까? 왜 듣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내가 바벨론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겠다."
바벨론은 당시 변방의 잔인한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하박국은 더 강하게 따졌습니다. "어떻게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십니까?" 하박국의 항의 밑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고, 나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이 그 전제를 무너뜨렸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너나 이스라엘이나 바벨론이나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자들만이 의인이며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들어 쓰는 악인들은, 정한 때가 되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박국은 그 말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하나씩 떠올렸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해가 멈추고, 불가능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그 역사들, 그러다 하박국은 깨달았습니다. 바벨론에게 쏟아질 그 무시무시한 저주가 원래 자기 자신에게 떨어져야 할 것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주신 믿음 덕분에 자신이 의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두려움 속에서, 하박국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이 기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의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에게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시고, 그 움직임이 우리 안에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에베소서는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믿음은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건져내신 분이 중간에 포기하실 리 없습니다.
빌립보서는 확언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삼각산 흔들바위 앞에서 기도하던 그 청년은 믿음이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박국도, 그리고 우리도, 처음부터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 사실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왜 나는 아직 이 모양인가" 하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시작하신 분이 반드시 마치실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에 이르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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