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태복음 13:51~52)
어떤 동물원에 독수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태어날 때부터 닭장 안에서 자랐습니다. 주인이 실수로 독수리 알을 닭 무리 사이에 두었고, 어미 닭이 품어 부화시킨 것입니다. 독수리는 자신이 닭이라고 믿으며 살았습니다. 모이를 쪼아 먹고, 흙바닥을 긁고,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알지 못한 채, 기껏해야 닭장 울타리 위까지 퍼드덕거리다 다시 내려앉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가 바로 그 독수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늘을 살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땅의 것들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좋은 집,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인정, 그것들을 얻기 위해 온 힘을 쏟고,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씁니다. 그 울타리 안에서 가끔 퍼드덕거리며 뛰어올랐다가 다시 내려앉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살아가는 것이라 부릅니다. 가끔은 그 퍼드덕거림이 제법 높이 올라갈 때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부지런히 살고, 착하게 행동하고, 봉사도 하고, 기도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꽤 훌륭한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다'는 뿌듯함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뿌듯함이 사실은 착각입니다. 닭이 울타리 위에 올라앉아 "나는 하늘을 날았다"고 자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는 그 착각이 오래갈수록 진짜 하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만족이 쌓일수록, '이것으로는 안 된다'는 갈증은 옅어집니다. 닭은 그렇게 모이를 쪼아 먹으며 땅에 안착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크게 보면 이 닭의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선언해왔습니다. 더 좋은 교육, 더 정교한 법, 더 진보한 기술, 그런데 그 선언들이 쌓이고 쌓인 오늘, 세상은 더 평화로워졌습니까? 전쟁은 멈추었습니까? 약자는 보호받고 있습니까? 역사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답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실패담이 아니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성경은 이 반복되는 실패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하늘에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똑똑히 배우도록, 하나님이 일부러 인간의 바벨탑 쌓기를 허용하고 또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다른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준비인 것입니다. 닭이 아무리 열심히 퍼드덕거려도 하늘을 날 수 없는 이유는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닭이기 때문입니다. 더 세게 날개를 치는 것이 답이 아닌 것입니다.
어느 날, 그 닭장에 주인이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닭들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 닭들을 하늘로 올려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좋은 모이를 주면 될까요? 더 높은 울타리를 세워 주면 날아오를까요? 아닙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닭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은 닭을 독수리의 날개에 얹어 하늘로 실어 나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 작동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애굽기 19:4). 광야 사십 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 법을 훈련받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반대였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 경험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철저한 무력함의 경험 끝에, 그들은 독수리의 등 위에 올라탔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성실하고 헌신적이었습니다. 봉사도 빠지지 않고, 성경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사업이 무너졌습니다. 가정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건강도 나빠졌습니다. 그분은 한동안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오랜 열심이 아무런 방패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너짐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제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증명하려고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무너지고 나서야 그 자랑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날개가 끊어지는 과정입니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이 과정 없이 독수리의 등에 올라탈 수는 없습니다. 닭이 죽어야 독수리의 등에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날개를 여전히 퍼드덕거리는 닭은 업힐 수가 없습니다.
착하게 살려는 노력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노력의 결과를 자신의 훈장으로 쌓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 훈장이 쌓일수록, 우리는 독수리의 등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중국 삼국시대, 조조의 군대가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입니다. 철수하자니 아깝고, 전진하자니 승산이 없었습니다. 조조는 저녁 식사로 나온 닭갈비를 바라보다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계륵(鷄肋)."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의 갈비뼈, 참모 양수는 그 한마디에 짐을 쌌습니다. 결국 철수가 답이었습니다.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많은 경우 계륵입니다. 내 체면, 내 성취, 내 착함, 내 열심, 내려놓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그것이 나를 하늘로 올려 보내주지도 않습니다. 마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것들이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륵을 손에 쥔 채 하늘을 바라보며 서성이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조조의 결단입니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닭의 날개를 스스로 접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독수리의 등에 넙죽 엎드리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등에 업힌 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날개로 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의 날개에 실려 납니다. 그 차이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자기 날개를 믿는 닭은 지쳐서 결국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독수리의 등에 업힌 자는 지칠수록 더 높이 오릅니다. 지침이 곧 독수리를 더 꽉 붙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3장에서 일곱 개의 비유를 마치신 후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그 질문의 핵심은 하나였습니다. 너희는 이제 더 이상 자기 날개로 날려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규례가, 그리고 우리 인생의 모든 실패와 무너짐이 우리에게 가르치려 한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너는 닭이다. 그러나 독수리의 등이 있다."
날개가 끊어진 닭으로 사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 끊어짐의 자리에서 예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독수리의 등에 업혀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하늘을 날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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