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에베소서 1:1~2)
어떤 단어는 너무 자주 써서 오히려 그 무게를 잃어버립니다. '은혜'가 그런 단어입니다. 교회에서 인사처럼 주고받고, 찬양 가사에서 반복되고, 기도의 첫 문장을 장식하는 그 단어가 은혜입니다. 그런데 정작 "은혜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말문이 막힙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설명하려 하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은혜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이 정의를 진지하게 붙들고 자기 삶에 대입해 보면 숨이 막힙니다. 내가 과연 자격이 없는 자였는가? 그렇다면 얼마나? 그리고 그 무상의 선물이 내게 실제로 임했는가? 이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어떤 응급실 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오늘도 환자를 살렸습니다. 물론 그 환자는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상태였지만, 제가 설명을 잘 했더니 스스로 일어나더군요."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이 설명을 듣고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의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구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고, 우리가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엡 2:1) 죽었습니다. 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기능이 약해진 것도 아닙니다. 완전히 죽었습니다. 시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무리 명쾌한 설교를 해도, 아무리 감동적인 음악을 틀어도, 시체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시체에게 필요한 것은 설득이 아니라 부활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 상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볼 능력도, 그분을 원한 적도, 그분을 맞이할 준비도 없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창세 전에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인간을 영적으로 완전히 무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죽은 자 쪽에서 무언가를 할 수 없다면, 살리는 쪽에서 먼저 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야기는 이 진리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제국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 바벨론, 이집트, 페르시아, 그들은 강대하고 문명이 발달했으며 수많은 민족을 지배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만약 하나님이 어떤 민족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려 했다면, 이런 강대한 민족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영향력 있고, 조직적이고, 이미 세상에 알려진 민족을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가장 적은 민족, 세상의 기준으로는 가장 볼품없는 민족,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신명기 9장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의로워서도 아니고, 마음이 정직해서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유가 이스라엘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 안에 있습니다.
왜 하필 가장 작고 약한 민족입니까? 거기서 힌트가 있습니다. 강한 민족을 택하면 사람들은 그 민족의 능력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민족이 역사를 바꾸는 일을 해낼 때, 사람들은 그 민족 안에 있는 어떤 능력이 아니라 그들 뒤에 있는 분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자격 없는 자를 택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같은 원리가 반복됩니다. 바울은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들이 택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한번 주변을 솔직하게 둘러보십시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무엇이 달랐습니까? 더 착했습니까? 더 도덕적이었습니까? 더 영적으로 예민했습니까? 아닙니다. 차이는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차이는 오직 은혜 안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이 원리의 극적인 실례입니다. 기독교 초대 역사에서 바울의 위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기독교인들을 가장 열심히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바울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옷을 벗어 던지며 돌을 들 때, 그 옷들을 맡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구경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의 책임은 내가 진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고도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반대편에는 스데반이 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하여 천사의 얼굴이었다고 기록됩니다. 죽어가면서도 박해자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스데반이야말로 위대한 사도가 될 최적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데반을 살려 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를 죽인 자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자격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격이 없을수록 은혜는 더 선명하게 빛납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이것은 겸손을 가장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런데 그 수고마저 은혜로 돌립니다. 수고를 했지만, 그 수고를 하게 한 것도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 노력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은혜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은혜를 오해합니다. 아니, 은혜라는 이름으로 전혀 다른 것을 원합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아이가 부모에게 선물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독특합니다.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청소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말합니다. "저 이만큼 했으니까, 이제 제가 원하는 것 주세요." 이것은 거래입니다.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내고, 봉사를 하고, 그러고 나서 기대합니다. '이 정도면 내 소원을 들어주시겠지.'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은혜 받았다"고 외칩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 구조 안에서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내 목적을 이루어 주는 수단인 것입니다. 왕은 여전히 자기 자신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런 상태를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이외의 어떤 존재에게도 진정으로 순종할 수 없는 자들,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 했던 아담의 후손들, 우리 모두는 본래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은혜는 이 구조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진정한 은혜를 받은 자는 왕의 자리를 포기합니다.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의 표현을 빌리면,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됩니다. 은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은혜가 그토록 충만하다면,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힘듭니까? 왜 병이 낫지 않고, 관계는 회복되지 않고,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까? 이 질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답하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가시가 있다고 말합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는 무언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세 번이나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족하다. 충분하다. 더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고통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한가운데서도 은혜는 이미 완전하게 임해 있다는 선언입니다. 가시가 제거되지 않아도 은혜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상황이 나빠져도 은혜는 감소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상황에 따라 많아졌다 줄어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조각가가 대리석을 다듬을 때, 대리석의 처지가 편하겠습니까? 끌이 박히고 망치가 내려칩니다. 그 순간 대리석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조각가의 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입니다. 걸작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빚어가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성도를 보면서도 불쌍하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안쓰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불쌍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게 임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걸작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불쌍한 일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짧은 인사 안에 엄청난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형제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앞에 '주', 헬라어로 '큐리오스'라는 호칭이 붙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존칭이 아닙니다. 구약 헬라어 번역본에서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번역할 때 쓰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형제인 우리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과 동등한 공동 상속자로 취급하신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어져 언제 쓸어버려도 항의할 수 없는 피조물들을, 하나님이 영원한 안식과 기쁨과 거룩을 함께 누리는 자리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우리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자였는지를 알고, 그런 자신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안다면, 더 이상 상황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던 시체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아깝고, 무엇을 그토록 이루고 싶으며, 무엇을 그렇게 갖고 싶습니까? 은혜가 부족한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 이미 족합니다. 그 풍성한 은혜와 평강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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