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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 천국의 참된 의미, 주체냐 대상이냐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6.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13:44~50)

1920년대 초, 오스트리아 빈의 한 카페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논리학자로 추앙받던 버트란트 러셀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오랫동안 스승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 아닙니다." 러셀은 잠시 굳어졌습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세워온 논리학의 탑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그림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서 계속했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우리가 오늘 이야기할 토끼와 오리 그림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그 그림을 보십시오. 길쭉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부리로 보면 오리입니다. 그런데 그 부분을 귀로 보면 순식간에 토끼가 됩니다. 같은 그림인데 무엇으로 보이느냐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 그림으로 언어의 본질을 설명했습니다. 언어의 의미란 하나의 명제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삶의 맥락 속에서 그때그때 새롭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진심 어린 감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뼈 있는 비꼼이 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이 주장은 당시 철학계에 폭탄과 같았습니다. 플라톤 이래 서구 철학은
'의미'란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어떤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그 탑의 기초를 흔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철학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생각,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종교도 예외가 되지 못했습니다. 어떤 종교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느냐는 종교다원주의가 그 파도 위에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한 가지를 놓쳤습니다. 그가 간과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어, 말씀입니다. 인간의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같은 말도 듣는 이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같은 상황도 처한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 상대성을 뚫고 들어오는 절대언어가 주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주체로서, 모든 것의 의미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언어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의 빛 아래서 볼 때, 이 역사와 인생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13장의 세 가지 비유가 바로 그 대답입니다. 선악과 이후, 모든 것이 뒤집혔습니다. 잠시 아주 먼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체이시고 인간은 그 주체에 의해 움직이는 객체,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원래 설계도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그 설계도가 찢겼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주체의 자리로 올라앉았고, 하나님을 객체의 자리로 밀어내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인간의 역사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흘러왔습니다. 주체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의 후예들이 무엇을 하는지 나옵니다. 성을 쌓고, 가축을 치고, 악기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문명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명은 영웅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영웅들을 중심으로 국가가 세워졌고, 국가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분배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민낯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이후의 인간에게 역사와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그 중심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성공, 나의 행복, 나의 나라, 나의 의,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무대이고, 하나님은 그 무대에서 나를 돕는 보조출연자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보는 역사와 인생의 그림, 즉
'토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착시입니다. 이 그림의 실체는 '오리'입니다.

여러분은 주일학교 때 아브라함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아마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운 아브라함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그에게 나타나신 것에서 왔습니다. 그가 대단한 사람이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 아브라함을 먼저 제시했다가 결국 그를 기각하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메우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다윗이 사울보다 더 극악한 죄인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밧세바 사건, 우리아 살해, 인구조사로 인한 재앙. 성경은 왜 이런 이야기들을 숨기지 않고 기록했을까요? 인간 다윗이 기각됨으로써 이스라엘의 진짜 왕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진짜 왕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도 예외가 아닙니다. 율법에 있어서 흠 없는 자라 자부했던 바울은 결국 그 율법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인간 율법주의자의 완전한 파산. 그 자리를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채우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구조입니다. 인간이 먼저 자신의 나라를 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인간 나라를 덮쳐서 부순 후 그 자리에 서십니다. 옛것이 부정되고 새것이 그 자리를 환치합니다. 그것이 역사이고 그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한 사람이 남의 밭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히 땅 속에 묻힌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캐보니 보화입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다시 묻어둔 채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그는 왜 밭 주인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도덕적으로 보면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냥 보화만 슬쩍 가져가면 더 간단할 텐데, 왜 굳이 밭까지 통째로 사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을까요?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학개서 2장에서 하나님은 예언하십니다.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그 보배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는 압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분은 보배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된다고 말합니다.

왜 걸림돌이 됩니까? 예수님을 보배로 받아들이는 순간, 지금껏 자신이 반석으로 붙들고 살아온 것들, 자신의 능력, 자신의 선함, 자신의 가문, 자신의 종교적 열심, 이 모든 것이 반석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쌓아온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주체의 성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밭 주인이 그 보화를 보화로 여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밭만 사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보화를 보화로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왜 보화만 들고 간 것이 아니라 밭 전체를 샀느냐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밭, 즉 이 세상이 더 이상 소유를 쌓아 주체의 자리를 굳히는 곳이 아니라, 오직 그 보화 하나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샀다는 것은, 세상이 가치로 합의해 놓은 모든 것들을 예수라는 보화 하나를 위해 내려놓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그 보화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바로 다음 비유가 그 대답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많은 분들이 이 두 비유를 같은 이야기로 읽습니다. 둘 다 천국을 위해 모든 것을 판다는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비유에서 천국은 보화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천국은 진주가 아니라 진주를 구하는 장사입니다.

그 장사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십니다. 그 진주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분은 그 진주를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팔아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찾아와 우리를 값 주고 사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눈에 우리는 보배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은혜에 의해 찾아진 우리는 비로소 그분이 진짜 보배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두 비유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보배로 알아보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 탁월한 영적 감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보배로 알아보게 된 사람들, 즉 성도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이 세상을 올바르게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했습니다. 중풍 병자를 고쳤고, 죽은 다비다를 살려냈습니다. 그야말로 초대교회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에서 이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데, 베드로가 선뜻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가 된 후에도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주체의 성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겠느냐는, 수십 년간 몸에 밴 그 생각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보려는 뿌리가 남아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 내 노력으로, 내 신앙의 열심으로 복을 받겠다는 생각, 하나님은 나의 성공을 도와주는 분이라는 인식, 그것이 바로 성도 안에 남아 있는 가라지입니다.

제자들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달라고 특별히 요청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유대인의 민족 주체사상으로는, 메시아가 오시면 이방인들은 당장 멸망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가라지를 그냥 두십니까? 그들은 자신들 안에도 가라지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항상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뽑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알곡을 함께 뽑을까 하노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 속에 얼마나 깊은 은혜가 담겨 있습니까. 지금 당장 우리 안의 가라지를 치시면 우리 전체가 멸망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새 생명인 알곡이 완성될 때까지 오래 참으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라지를 조금씩 소멸시켜 가십니다.

이방인의 집에 가지 않겠다던 베드로, 그 상태가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나타난 현상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도덕과 윤리로, 혹은 세상적 성공과 번영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판단의 자리가 바로 우리가 주체의 자리에 올라앉으려 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판단은 추수 때 내가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비유로 가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이 비유를 전도의 비유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단 그물로 다 끌어오면 나중에 추려낸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판의 비유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이미 예수님의 심판의 그물에 걸려 있습니다. 좋은 고기든 나쁜 고기든, 그 어떤 것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물 속에서 나쁜 고기가 좋은 고기로 변할 수도 없고, 좋은 고기가 나쁜 고기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예정이고, 선택이고, 하나님의 편애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 겸허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물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물 속에 갇힌 물고기입니다. 내가 어떤 고기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가 무슨 자기 의를 챙기고, 무슨 이름과 평판과 가치를 쌓아 올리겠습니까. 성도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이 우리의 살 길이며 진정한 보화임을 배워가는 것뿐입니다.

1903년 구스타프 클림트가 완성한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황금빛 배경 위에 한 여인의 초상을 담은 그림으로, 훗날 1억 3천5백만 달러에 낙찰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그림이 소더비 경매장이 아니라 길거리 신문지 위에 무심하게 놓여 있다면 어떨까요? 발길질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나가던 이가 그 그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림을 보는 안목이 없으면 아무리 명화도 길거리 그림에 불과합니다.

천국이 이 세상에 그렇게 와 있습니다. 천국은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부정되고 해체되는 모습으로, 자신이 쌓아온 나라와 의가 무너지는 모습으로 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스럽고 초라해 보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황후는 궁녀 복을 입고 궁녀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황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다만 초라한 복장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천국이 우리 가운데 그렇게 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눈이 떠진 사람들은 지옥처럼 고통스럽고 초라한 현장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그리고 화려한 성공과 번영의 현장 속에서 오히려 진짜 지옥을 봅니다. 전도서의 솔로몬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행복의 조건으로 내어놓는 웃음과 희락이 미친 짓이라고 그는 탄식했습니다. 그것들은 리모컨 스위치가 꺼지는 순간 사라지는 TV 드라마 같은 것입니다.하나님은 곧 그 파워 스위치를 누르실 것입니다.

거지꼴의 이몽룡을 알아본 춘향이처럼 춘향전의 결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몽룡이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을 때, 변사또의 잔치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초라한 외양이 그의 실체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춘향이는 달랐습니다. 옥중에서도 그를 기다리며 그가 진짜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던 춘향이는, 거지꼴의 그 남자 안에서 자신의 낭군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눈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현장 속에서, 인간의 자아가 부정되고 해체되는 그 자리에서 천국을 알아보는 눈은 인간의 총명과 지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피조물이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대상의 자리로 옮겨 앉는 것, 그것이 천국입니다. 세상의 힘과 가치와 재화로 행복에 이르겠다는 희망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의 자리에서 진짜 보화인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물 주인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좋은 고기로 부르셨습니다. 진주장사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우리를 사셨습니다. 밭 속에 감추인 보화처럼, 이 세상 속에 천국이 와 있습니다. 그 천국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십시오. 눈을 똑바로 뜨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