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이야기

기독교 - 구약과 신약, 하나의 언약, 하나의 완성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3.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린도후서 3:6)

어떤 건축가가 있습니다. 그는 웅장한 성당을 짓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설계도를 그리고, 기초를 놓고, 기둥을 세웁니다. 공사 현장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면 고개를 갸웃할지 모릅니다. 철근이 삐죽 솟아 있고, 벽은 절반만 올라가 있으며, 아직 지붕도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건물은 뭔가 부족하다. 결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함이 아닙니다.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인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가 꼭 이와 같습니다.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의 책들이 말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그 하나의 이야기를 구약은 예비하고, 신약은 성취합니다.

기원전 13세기 무렵,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노예로 수백 년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을 이끌어 내셨고, 시내 산에서 엄숙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단순하고 명확했습니다.
"내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 이것이 옛 언약의 전부였습니다. 순종하면 복, 불순종하면 저주, 깔끔하고 공정한 계약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 첫 언약에 흠이 있었다고 말합니다(히 8:7). 혼란스러운 말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셨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언약은 처음부터 그 자체로 완성품이 아니었습니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언약, 즉 아직 지붕이 얹히지 않은 건물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인간 쪽에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제사를 형식으로 때웠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70년의 유배 생활 끝에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귀환한 그들은 성전을 다시 세웠습니다. 새 출발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서가 증언하듯, 고향에 돌아온 그들은 또다시 옛 버릇을 반복했습니다. 흠 있는 짐승을 하나님께 바치고, 십일조를 아까워하며 쓸모없는 것으로 채웠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선언하셨습니다.
"너희가 총독에게 그런 것을 드려 보아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말 1:8). 구약은 그렇게 인간의 완전한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누군가 와야만 한다는 절박한 예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합니다. 율법이 나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계시해 주는 훌륭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선생님은 덧셈을 가르칩니다. 1+1=2. 아이는 배웁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갑자기 미적분 문제를 내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는 그것을 풀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덧셈을 가르친 선생님이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선생님은 아이가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도록 기초를 놓아준 것입니다.

율법도 그러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고 거룩한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인간이 그 기준에 얼마나 절망적으로 미치지 못하는지를 드러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가리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 3:24)이라 했습니다. 선생님의 역할은 학생을 영원히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히 10:1). 그림자는 실체가 있음을 증명합니다. 빛 없이 그림자는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와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의 그림자였습니다.

구약의 제사 의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하나의 일관된 패턴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흠 없는 짐승을 데려옵니다.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어 자신의 죄를 전가합니다. 그리고 짐승이 대신 죽임을 당합니다. 죄인은 살고, 죄 없는 제물이 죽습니다.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이 의식이 반복되었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이 제사들이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3-4).

왜 완전히 없애지 못합니까? 왜 해마다 반복해야 합니까? 그 동물들이 가리키는 실체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계도만 있고 아직 건물이 완성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 설계도가 가리키는 완성된 건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영원히 유효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제야 수천 년의 반복이 멈추었습니다. 설계도의 역할이 끝난 것입니다.

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창세기의 첫 창조 속에도 이미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빛과 함께 어둠이 그대로 공존합니다. 물과 뭍이 나뉘었지만 혼돈의 그림자는 여전히 맴돕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단번에 완벽한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을까요?

바울은 그 창세기의 빛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밝힙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창조의 빛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첫 창조는 임시적이며 낡아질 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태양도 빛을 잃을 것이고 달도 기울 것입니다. 어딘가 아쉽고 허전한 이 세상의 느낌,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곳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창조 속에 이미 심어 두셨습니다. 불멸하고 썩지 않는 새 창조, 그것이 목적이며, 첫 창조는 그것을 향한 모형인 것입니다(히 9:23).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오순절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한 유월절로부터 정확히 오십 일째 되는 날, 곧 오순절이었습니다.

그날 산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절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율법이 죄인들에게 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출 32:28). 율법은 정죄했고, 죄는 사망을 불렀습니다.

시간을 건너뛰어 신약의 오순절로 가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 오십 일째 되는 날,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이 예수를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느니라." 군중 속에 뜨거운 것이 흘렀습니다. 그날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2:41).

율법이 임했을 때 삼천 명이 죽었고, 성령이 임했을 때 삼천 명이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자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에서 율법을
"죽게 하는 직분", "정죄의 직분"이라 하고 복음을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이라 부른 것은 이 맥락에서입니다.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율법이 향하던 완성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그 율법의 목적이 완수된 것입니다.

구약 없이 신약 없고, 신약 없이 구약도 없습니다. 어떤 영화는 앞부분 없이는 결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1막과 2막의 갈등이 없으면 3막의 해결이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구약이 그 1막과 2막입니다. 수천 년의 인간 실패, 수백 년의 포로생활, 돌아와서도 반복되는 죄악, 그 모든 것이 없다면 십자가는 그저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배경 위에서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준비하고 계셨던 유일한 해답임이 드러납니다.

반대로, 신약 없는 구약은 사막의 신기루입니다. 시원한 물을 약속하는 듯하지만, 정작 그 자리에는 뜨거운 모래바람만 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살 수 없는 인간에게 요구만 높아지는 것은 절망일 뿐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율법만을 붙드는 유대교가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섬기노라 하지만, 구약이 가리키는 그 실체를 거부하고 있으니, 그것은 영화의 1막과 2막만 보고 극장을 나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전체는 한 방향으로 달립니다. 돌판에 새겨진 율법으로부터, 마음에 새겨지는 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정죄에서 의로움으로, 그 길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새 언약 아래서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얻은 우리는, 낡아 없어질 이 땅의 것들에서 눈을 들어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건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