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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 겨자씨와 천국의 은닉성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9.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복음 13:31~32)

2005년 겨울, 한국 극장가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 한 편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주인공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왕에게 눈을 뽑히고도 웃는 광대였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은 권력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 연산군의 실체를 희극으로 발가벗깁니다. 그들의 무기는 칼이 아니었습니다. 웃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웃음 때문에 그들은 눈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눈먼 채로 줄 위에 선 공길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성경 한 구절이 겹쳐집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역사는 언제나 두 나라의 충돌로 쓰여왔습니다. 하나는 힘의 나라입니다. 탑을 쌓고, 이름을 떨치고, 더 높이 오르려는 나라입니다. 성경의 첫 장부터 이 나라의 시민들은 등장합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네피림"이라 불렸습니다. 거인들, 용사들, 유명한 자들, 세상은 그들의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포브스 선정 인물들, 수백만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들,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이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시민권은 노력으로 얻지 못합니다. 성경이 노아에게 붙인 수식어는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업적도, 능력도, 혈통도 아닙니다. 딱 하나였습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나라는 언제나 충돌했고, 언제나 은혜의 나라가 당했습니다. 가인은 열심히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것을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분노 뒤에는 사실 이런 질문이 숨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그 질문의 끝에는 살인이 있었습니다.

아벨은 형에게 죽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열심이었던 자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눈을 뽑혔어도 하늘로 오른 공길처럼 말입니다.

기원전 600년경, 예루살렘은 멸망 직전이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절박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성벽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비밀리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애굽에 원군을 요청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꽤 그럴듯한 외교적 선택이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바벨론과 유다 사이에 애굽이 있고, 애굽은 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이 선택을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문제는 전략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시드기야가 스스로의 꾀로 미래를 개척하려 했다는 것, 하나님의 통치 앞에 항복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은 그에게 백향목의 비유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은 나무의 꼭대기를 꺾어다가, 높은 산에 직접 심으시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높아진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옮겨 심으신 연한 새순입니다.

그로부터 600년 후, 갈릴리 어느 길가에서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 청중의 머릿속에는 에스겔서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백향목을 기대했습니다. 로마를 몰아낼 메시아, 다윗 왕국을 회복할 정치적 영웅, 그런데 예수님은 겨자씨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입니다. "이게 뭐야?" 싶을 만큼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실제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 목수의 아들로 자랐고, 결국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져 죽었습니다. 힘을 추구하는 세상은 그 광경을 보며 비웃었습니다.
"메시아가 저래서야 어떻게 다윗 왕국을 회복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바로 침공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의 동사는 사실 방향이 반대입니다. 천국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세상을 침노하여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침공의 무기가 바로 약함이었습니다. 십자가였습니다. 눈 뽑힘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고, 십일조를 철저히 했으며, 교회 봉사에도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드릴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발견해요. '이 정도면 되겠지. 하나님이 뭔가 해주시겠지.' 그게 기도인지 거래인지 모르겠어요." 그 고백은 정직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천국이 한 사람의 삶 안으로 침노할 때, 가장 먼저 결박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강한 자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어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통제하려는 '나', 착한 척, 경건한 척하면서도 결국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나'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내면의 왕국이 해체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기분 좋은 과정이 아닙니다. 가인처럼 분노가 치밀기도 하고, 시드기야처럼 자꾸 다른 출구를 찾기도 하고, 하박국처럼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라고 울부짖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해체의 끝에 겨자씨가 있습니다.

한때 기독교는 세상을 바꿨습니다. 초대 교회는 핍박 속에서 자랐습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었고,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공동체가 로마 제국의 심장부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정확히 겨자씨처럼,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그 안에 엄청난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교회는 박해를 벗어났습니다. 성당이 세워졌고, 주교들은 귀족이 되었고, 십자가는 황제의 문장이 되었습니다. 겨자씨가 겨자나무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 새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십자군의 검을 든 새들, 종교재판의 망토를 입은 새들, 권력과 재물을 향해 날아드는 새들 입니다.

에스겔서 31장은 앗시리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하늘을 찌를 듯 성장했고, 그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교만한 나무를 찍어버리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바벨론에 몰려드는 무리를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라 부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 등장하는 새들이 복된 것인지, 아니면 그 새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요한일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성도는 세상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은둔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저렇게 성공하는구나, 저렇게 착해지는구나"라는 말을 듣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의 아삽은 솔직했습니다. 그는 악인들의 형통을 보며 거의 실족할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그러다 그는 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번영은 하나님이 깨신 후에 멸시당할 한순간의 꿈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겨자씨의 삶입니다. 지금 당장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세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그 안에 이미 완성된 것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평생 시골 교회의 청소를 도맡았습니다. 설교 한 번 해본 적 없고, 유명세를 탄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거쳐간 수십 명의 아이들이 그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 중 일부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그 할머니를 몰랐습니다. 아마 천국은 알았을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봅시다. 공길은 눈이 없습니다. 연산군이 뽑아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줄 위에 섭니다. 그리고 날아오릅니다. 이것이 겨자씨의 역설입니다. 찍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에서 하늘로 솟는 것, 발가벗겨지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수치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흘러나오는 것, 죽음처럼 보이는 그 십자가가 사실은 세상을 향한 침공의 전선이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영광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 감추어진 겨자씨들이 비로소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 전까지 우리는 은닉되어 있습니다. 세상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작은 자로, 때로는 눈을 잃은 채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압니다. 겨자씨는 죽어서 땅에 묻혀야 자랍니다. 그 작음과 감추어짐이 수치가 아니라 본질입니다. 세상 나라처럼 힘으로 커지려다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겨자씨처럼 보잘것없이 살다가 영광스럽게 천국에 입성하는 쪽이 낫습니다.

오늘도 어디선가 눈을 잃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인정받지 못한 이, 신실하게 믿었는데 상황이 풀리지 않는 이, 세상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이, 당신은 겨자씨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 나무가 이미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높이 날아오를 날을 바라보며, 오늘의 눈 뽑힘을 견뎌내는 것이 이 땅에서의 천국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