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가복음 7:6~8,1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멀고 먼 길을 여행한 이유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에 따르면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그들은 환난의 원인을 율법 준수의 부족함으로 여겨 더욱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 했고, 그 과정에서 미쉬나와 탈무드라는 세밀한 규정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답하십니다. 문제는 손을 씻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음식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란 우리가 처한 상황, 여건, 경험, 체험, 노력 등 외부의 모든 요소를 의미합니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이런 외적 요소들로 신앙을 정의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경험을 했는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가?"로 신앙의 경중을 재려 합니다.
기적적인 체험이나 기도 응답이 신앙에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내용이 되면 신앙은 비교와 경쟁의 장이 됩니다. "내 기도 응답이 더 큰가, 당신의 것이 더 큰가?" "내 체험이 더 강렬한가, 당신의 것이 더 강렬한가?" 이런 질문들이 난무하게 됩니다.
간증도 점점 자극적이 되어갑니다. 지저분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받은 것처럼 여겨지면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더 극적으로 꾸며내기까지 합니다. 겨우 무좀 나은 것을 발이 썩어 들어가던 것으로, 동네 양아치 노릇을 조폭 두목이었던 것으로 과장합니다. 이는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후 더 자극적인 기적을 원하며 찾아온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떡 먹고 배불러서 날 찾아왔다." 외적 체험으로 신앙을 정리하는 이들은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구원이라는 진정한 기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돼, 곱게 믿어야지"라며 기적과 체험을 멀리하는 것도 답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바리새인이 됩니다. 한쪽은 체험과 경험으로, 다른 쪽은 올바름과 교양으로 자신을 자랑합니다. 결국 둘 다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신앙을 정의하는 동일한 오류를 범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의 진정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이러했던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뜯어내고 새 마음을 창조하셨습니다.
에스겔 36장 26~27절에서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셔서 하늘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이제 착한 일만 할 수 있는 마음입니까? 우리는 아직 완전히 착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6절은 답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새 마음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까지 알아서, 그 예수님을 기뻐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는 체험, 경험, 노력, 선행으로 시작되거나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성령께서 그 새 마음을 가지고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십니다.
그렇다면 왜 기적이 필요하며 왜 자극적인 체험이 필요합니까? 새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믿어지지 않으니 자꾸 기적을 보려 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방언을 하고 싶어 할까요? 교리적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화끈한 체험이 있으면 신앙이 한 단계 더 높아질 것이라 여깁니다. "다 하는데 나만 못한다"는 자괴감이 방언 욕구를 부채질합니다. 과거에는 삼각산 기도원에 방언을 가르치는 방이 따로 있었고, 어떤 교회에서는 "할렐루야"로 방언을 연습시킨다고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가슴으로 깨달은 사람은 절대 누구에게도 자신의 신앙이나 성경 지식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자리에서 구원받았는지 아는 자가 어떻게 남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정죄하겠습니까? 외적으로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남보다 낫다는 근거가 된다면 그는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예언하기를 힘써라"고 권면합니다.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였고, 방언은 알아듣지 못하는 계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방언에 반드시 통역을 붙이셨습니다. 바울이 "통역 없는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권고한 이유입니다.
구약에서 방언은 항상 심판을 그릴 때 등장했습니다. 이사야 28장에서 하나님은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앗수르 군사의 언어가 이스라엘에게는 방언이었습니다. 즉 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아, 너희는 심판받게 될 것이다"라는 표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이해하고 계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언이 교회에 유익이 되려면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은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14장 14~15절에서 바울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의 초점은 방언이 전인격적 기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선언합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19절에서 바울은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이해하고 깨달은 다섯 마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자랑하는 이기심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은사를 추구하느라 정작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성숙을 놓치는 것을 경고합니다.
은사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지금도 능력으로 다스리신다는 증거입니다. 누구에게 은사가 임했다는 것은 "성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받은 은사를 자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입니까?
예수님의 광야 40일은 그의 공생애 전체를 요약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교회들의 인생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로 이끌려 가셨고,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받으셨습니다. 주목할 점은 "날 수가 다하매"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날 수까지 지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서" 시험당했습니다. 사탄이 시험하지만 성령이 이끌고 가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험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의 인용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생존은 100%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답하셨습니다. 신명기 6장 16절, 맛사에서의 교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습니다. 지금 주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시험들을 하나하나 성공으로 완성시켜 우리 교회에게 선물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 시험은 마귀가 세상을 주겠다고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영광으로 가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까? 인간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까? 그것은 옛 몸, 옛 성품, 죄의 경향, 하나님 없이 살도록 훈련되고 습관된 악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죽을 것 같습니다. 안 하면 미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고 불행하게 사는 것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죄가 되어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를 매일 죽여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건너뛰고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광야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나안의 풍요를 훔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져서 하나님 나라에서 전혀 어색함 없이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광야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 삼키는 동안에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새 마음을 싸고 있는 옛 성품, 죄의 경향, 집착과 중독, 통제 성향, 자기 방어 같은 것들을 깨 나가십니다. 평생 하나님 없이 반대 방향으로 가게끔 훈련되고 익숙해진 근육들을 다 풀어버리시고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 세심한 배려가 우리에게는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밝게 볼 수 없습니다.
천국은 이 땅에 겨자씨로 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잘것없는 분으로 오셔서 하릴없이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겨자씨의 모습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그 겨자씨의 삶을 살다가 갑니다. 자기가 가진 체험으로 멋지게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보잘것없게 보여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은사나 재능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숨겨져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장 18~19절의 겨자씨 비유는 에스겔서 17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바벨론과 유대와 애굽의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가 범죄하자 바벨론을 시켜 치게 하셨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힘과 지혜로 난국을 이겨내려 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대신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드기야와 유대를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으리니,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겔 17:22~23)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백향목의 모습이 아니라, 높은 백향목 꼭대기의 가지를 꺾어 아래에 심은 모습으로 옵니다. 꺾여 심기운 연한 가지가 누구입니까?
이사야 53장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만약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오셨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꺾어진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연한 가지의 정체는 온갖 새들이 깃들 수 있는 엄청난 백향목입니다. 그러나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비우시고 초라한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아직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영광과 능력과 권세로 오시면 그들은 구원받기 전에 죽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감추시고 겨자씨처럼, 연한 가지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그 예수의 품안에 숨겨진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성도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자들입니다. 그런 신분을 이미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며 자신만 군계일학인 것처럼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우리를 증명하는 데 쓰는 시드기야 같은 자들이 아니라, 가진 권세와 힘으로 연약한 자들을 일으키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신비적 체험이나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자랑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나는 어떤 인간이며, 하나님은 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죽이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시험을 통해, 환난과 고난을 통해 점점 알아가게 되는 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겨자씨이고 꺾여 심기운 연한 나무 가지인 것입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은 이런 삶을 잘 보여줍니다. 1700년대 후반,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과수 폭포 위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가브리엘 신부는 오보에 하나를 가지고 맨발로 절벽을 기어 올라가 아름다운 곡을 연주했습니다.
노예 상인 출신 로드리고는 속죄의 의미로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끌고 올라가 원주민들에게 용서를 받았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려는 조약을 맺자, 가브리엘 신부는 원주민들과 함께 십자가를 들고 무저항 행진을 했고, 로드리고는 다시 칼을 잡고 싸웠지만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을 설득하러 왔던 교황청 추기경은 나중에 말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신부 몇 명과 과라니 족의 멸종으로 끝났습니다만 죽은 것은 저 자신이고 저들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힘이다. 총칼로, 재물로, 명예로운 직업으로 우리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겨자씨의 모습으로, 꺾인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면서 오늘도 나의 추잡한 인격의 한 부분이 죽고, 나의 고약한 습관이 죽고, 나의 악한 생각들이 죽는 것으로 기뻐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를 좀먹고 있는 신비주의나 기복주의에서 벗어나 참 신앙의 장으로 어서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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