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복음 16:22~24)
어떤 성도가 기독교 서점에서 책 제목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곳에 멈춰 섰습니다. '보좌를 흔드는 기도', '강청 기도의 능력', '응답받는 기도'……. 진열대를 가득 채운 그 제목들은 하나같이 뜨겁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 책들을 집어 드는 손들의 마음을 그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그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어내고 싶어서 하나님의 보좌라도 흔들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진열대 앞에서 조용히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서 계획하신 것은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작정하고 목적하신 것은 그 순간 이미 완성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묵시의 세계, 곧 하늘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이 바로 이 진리를 가리킵니다. 하늘에서 완성된 그 계획이 역사의 무대 위에서 가시적으로 펼쳐져 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졸라서 그 계획을 바꾸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요구에 조변석개하는 신이 무슨 전능한 신이겠습니까? 기도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도란 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은혜를 허락하시는 수단은 세 가지입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와 성례입니다. 기도는 그 세 가지 중 하나로서, 신앙생활의 중추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수단이 엉뚱하게 사용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팔다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물지 못한 그 팔다리는 아기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멋모르고 뜨거운 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웅덩이를 향해 돌진합니다. 유익을 주려고 주신 것이 도리어 해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유익을 위해 주신 기도가 오용될 때, 그것은 신앙생활을 해치는 도구로 전락합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기도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죽었던 영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 세상을 등지고 천성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마귀는 그 살아난 영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기도는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이 땅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그 공격에 맞서며 신앙의 길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기도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생존 수단이지, 세상에서의 소원성취 도구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기도는 지성소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구약에서 지성소는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이 흠 없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그 즉시 죽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곳을 우리가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말갛게 씻겼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예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이 지성소가 된 것입니다. 그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수시로 대화하며 삶의 방향을 묻고, 서럽고 힘들 때 위로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 기도를 왜곡시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오로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구하는 데만 기도를 쓰도록 유혹합니다. 두려운 것은 마귀에게도 그러한 기도에 응답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고 한 그 목소리를 기억하라(눅 4:6).
마귀는 때로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기도에 응답함으로써 기도라는 강력한 영적 무기를 부질없는 것에만 쓰게 만들고, 하나님을 마치 알라딘의 지니처럼 인간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해결사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구하는 것이며,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내일'은 부사가 아니라 주어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니, 너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그 답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들의 사업 번창이나 건강 회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9~11). 지혜, 분별, 거룩한 열매, 인내,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물론,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께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부탁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슨 형식이 필요하고 무슨 특별한 시간이 필요합니까? 아이가 아버지에게 조르듯 수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정상적인 기도 생활입니다.
실연을 당했을 때 "아버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하고 아버지 앞에서 울 수 있습니다. 사업이 힘들어졌을 때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아버지의 의중이 무엇입니까?" 하고 여쭤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거 해결해 주지 않으면 굶겠다"는 식의 자해 공갈이나, 하나님의 의중은 아랑곳없이 소리치며 협박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필요한 것을 자녀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분이 들어주시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의중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며, 거기에 필요한 것이 기도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 가시는 데 불필요한 것은 절대 주시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목적은 자녀들이 이 불타버릴 땅에 뿌리를 박고 만사형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진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도록, 나그네로 사는 이 세상에서 자꾸 정을 떼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야고보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면, 왜 기도하라 하십니까? 에스겔 36장이 그 답을 줍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상황, 회개조차 없는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뜻밖의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
하나님은 이미 하실 일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왜입니까? 나중에 "아, 하나님께서 하셨구나"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시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으로, 혹은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성도의 기도를 수단으로 이루시며, 그 일의 공로를 나중에 성도에게 돌려주십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성도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에만 빠져 하나님의 일을 외면할 때, 하나님은 성도를 훈련하십니다.
성경이 '파이데이아'를 '징계'라 번역하여 흔히 벌로 이해하지만, 그 단어의 본뜻은 제자훈련, 곧 하나님 자녀의 자녀 됨을 빚어 가는 교육입니다. 그 훈련을 통해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기도의 공로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나 잘했지요?"라고 뻐길 일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포기할 수 있게 되고, 감사하게 ㄷ늽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숙해갑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 106:15).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욕심을 따라 구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영적 성숙에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의 응답 목록이 길다고 해서 올바른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 그것이 올바른 기도의 척도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십자가로 눈이 뜨이면 더 이상 세상의 힘과 영광을 구하지 않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구해야 할 다른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삶, 거룩한 삶으로의 전진과 성숙,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기도의 마무리 공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면 아버지께 어떤 기도를 하셨을까?"를 먼저 묻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사도들의 기도가 어떠했습니까?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기도였고, 그 완성을 이루어 가는 성도의 인내와 거룩한 성숙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다는 말씀(막 11:23)도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물리적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진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은 성전이 있는 산, 곧 구약 율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청소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참 성전인 예수가 아니면, 형식적인 열심과 노력으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율법의 산은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대로,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 40:4~5)는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그 율법의 산이 이미 던져졌음을 알고, 그 실재가 자신의 삶 속에서도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이제 이런 것을 구하게 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회개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는 욕구가 싹트면서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주시겠다는 약속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십자가와 보혈을 근거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 영원한 하늘 백성으로서의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한 거룩한 구함에, 하나님은 완벽하게 응답하십니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무조건 낫게 해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여쭤보십시오. "하나님, 이 병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아픔을 통해 이루시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자리까지 나아가십시오. "어떤 이유이든 선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선한 결과를 이루실 것이고, 저는 그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인내의 열매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저 사람만 없으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기도하기 전에, 이 자리까지 가십시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미움이 있습니까? 저 사람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채찍이군요. 그것을 알았으니 그를 미워하는 대신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리겠습니다." 거기서 사랑의 열매가, 용서의 열매가 맺힙니다.
기도의 내용은 결국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향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대면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날마다 감격하는 자리입니다. 눈을 감고 "아버지"를 부르는 그 순간, 그 대화를 들으시는 분이 실존하신다는 경이로운 사실 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요구 목록을 내려놓고, 그 분의 의중을 묻는 자리에서, 우리는 조금씩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기도,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를 은혜의 수단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올바른 기도 생활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복음 16:24)
'성경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기독교 - 외식의 참된 의미 (0) | 2026.04.16 |
|---|---|
| 새 언약(4) - 쏟아지는 영, 한 이름으로 모이다 (0) | 2026.04.14 |
| 라멕의 칼노래, 그리고 뒤집힌 세계 (0) | 2026.03.25 |
| 기독교 - 성찬이란 무엇인가, 성찬의 참 의미와 영적 의미 (1) | 2026.03.23 |
| 새 언약(3) -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구원 (0) | 2026.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