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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 왜 못 알아들을까,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22.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16:31)

어떤 신학생이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있는 방은 조용했습니다. 관람객들은 저마다 작품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그림 앞에서 오래도록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
성경이 있는 정물'이었습니다. 화면 중앙에 커다란 성경책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그 옆에 꺼져가는 촛불이 있습니다. 고흐의 아버지, 목사였던 테오도루스 반 고흐를 상징한다고 알려진 그 촛불은 이미 많이 녹아 짧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책 앞에, 닳고 너덜너덜해진 소책자 하나가 놓여 습니있다. 에밀 졸라의 소설 『나의 기쁨』입니다.

고흐는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철저한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벨기에 탄광촌 보리나주에서 7년간 광부들 곁에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옷과 음식을 나눠주고, 병자들을 돌보고, 가진 것을 몽땅 내어주다가 결국 선교사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그는 진심이었습니다. 그 진심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멈추게 한 것은 그림의 아름다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물음이었습니다. 정의를 사랑하고, 가난한 이들 곁에 자신을 던지고, 성경을 읽으며 예수를 따르려 했던 이 사람이, 왜 서른일곱 살에 자기 머리에 권총을 쏘았을까요?

그 시절 그는 신앙의 방향을 막 정리해가고 있었습니다. 기복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은 틀렸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부귀와 명성을 추구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고흐처럼, 간디처럼, 슈바이처처럼, 가난하고 압제받는 이들 곁에서 한 몸을 불사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삶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고흐의 비극적 최후는 거대한 물음표였습니다.

그는 그 화두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성경을 통해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기독교도 틀렸지만, 인간적 열심으로 세상을 변혁하겠다는 신앙도 똑같이 틀렸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두 가지 속박에서 그를 풀어낸 말씀이 바로 누가복음 16장의 비유,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는 널리 퍼진 구전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건너온 이야기로,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착하고 가난한 율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율법을 성실히 지켰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반면 못된 부자 세리는 이웃을 착취하며 살다가 지옥에 갔습니다. 천국에서 율법사는 맑은 시냇물을 마음껏 마셨지만, 지옥에서 세리는 물 한 방울도 얻지 못했습니다.

청중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착한 사람은 천국, 나쁜 사람은 지옥,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그 가난한 율법사에 자연스럽게 대입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고, 구제에 힘쓰는 자신들이야말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구도를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선행을 근거로 천국에 가고 악행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그 논리를 해체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쌓아도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으면 지옥에 가고, 아무리 내세울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천국에 갑니다. 바리새인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신 것이었다.
"당신들이 바로 그 이야기에서 지옥에 간 부자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 비유의 배경으로 이런 말씀을 기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눅 16:14) 그런데 이상합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바리새인들 중에는 실제로 매우 검소하고 청빈하게 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진짜로 가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그들을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
부자'는 단순히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존재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붙들고, 그 ''의 유익과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전부가 부자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는 소유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임을 알고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구제와 율법 준수는 사실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만족, 인기, 명성을 얻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겉으로는 돈을 멀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모든 선행이 '
'라는 우상을 섬기는 행위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완벽한 부자였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비유 속 부자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그 부자는 사실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대문 앞에 쓰러진 거지 나사로를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도록 허락했습니다. 온몸에 궤양이 터져 개들이 핥아먹는 나사로를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지옥에 가서도 형제들을 걱정했고, 회개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구제, 배려, 전도에 대한 관심, 회개의 필요성,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지옥에 있습니까?

지옥에서의 그의 말과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 그는 지옥에서도 '
내 가족'에게만 관심을 가집니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인지상정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가족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라는 우상의 울타리 안에 가족까지 끌어들여 자기를 확장하는 인간의 본성을 깨뜨리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여전히 ''의 확장선 위에 있는 혈육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회개를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내려가 전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이 말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충분히 충격적인 경험을 주면 인간 스스로 회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양은 스스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목자가 찾아 나섰습니다. 회개는 인간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셋째, 그는 지옥에서도 나사로를 부립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나사로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킵니다. 자신이 여전히 그 거지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의식이 뼛속 깊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지위와 공로와 행위의 차등이 자신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믿음, 그것이 율법주의에 빠진 부자의 본색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무엇을 했기에 천국에 갔습니까?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람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 단 한 곳뿐입니다. 수많은 비유에서 등장인물들은 그냥
'어떤 사람', '한 농부', '어떤 왕'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거지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나사로'는 히브리어 '엘아자르', 곧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나사로가 천국에 간 이유를 이 이름 하나가 설명합니다. 그가 착하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천국에 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나사로라는 이름은 요한복음의 나사로와 연결됩니다.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에서 살아 나온 그 사람입니다. 그 기적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일부는 믿었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굳혔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눈앞에서 보고도, 타락한 인간은 은혜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비유의 마지막 말씀이 바로 그 사건의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인간은 왜 히말라야를 오르고, 남극에 깃발을 꽂으며 "
정복했다"고 외칩니까? 자기 이외의 대상을 굴복시켜 '내가 이겼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라는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정복입니까? 산은 여전히 거기 있습니다. 자연은 기온 하나로 인간에게 옷을 갈아입히지 않습니까? 히말라야를 정복한 사람도 고산병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에게 정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정복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히말라야 꼭대기에 올라가 깃발을 꽂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그때 비로소 산이 무력해집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을 때, 그것이 진짜 정복입니다.

사상가 자크 엘룰은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을 정복하는 것은 돈을 끌어모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가난한 자에게 그냥 줘버리는 것입니다. 돈이 떠나가면서
"왜 나를 무시하느냐"고 할 때, 그것이 정복입니다. 성도는 무언가를 정복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정복당하는 자입니다.

아르헨티나에 사는 한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집사님은 어느 날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매일 말씀과 찬양을 들으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던 중 치질인 줄 알았던 것이 직장암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종류의 암이었습니다. 투병 중에도 집회에 참석했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마지막 날, 그는 의식이 또렷한 상태였습니다. 아내와 두 손을 마주 잡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떠났습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찬양을 수시로 들으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정복입니다. 죽음이 그 앞에서 무력해진 것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에서 때로 쓸모없어 보입니다. 주식 투자에도, 자녀 교육에도, 직장 승진에도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인생의 배가 침몰하는 순간, 복음은 유일한 구명보트가 됩니다. 그 순간 세상에서 쓸모 있던 것들은 하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를 건집니다.

우리는 이제 고흐가 왜 그 고통 속에서 살다가 끝내 자기 머리에 총을 쏘았는지 압니다. 그는 성경을 읽었지만, 성경 속에서 진짜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아버지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간파한 것까지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해법이 틀렸습니다. 그는 졸라처럼, 간디처럼, 자신의 열심과 헌신으로 세상에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사상이며, 부자의 사상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
'의 가능성에 기댄 삶, 그 삶은 결국 ''의 무너짐과 함께 파국을 맞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도 말씀 앞에서 자신의 실체가 폭로될 때 귀라도 자르고 싶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고통의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런 존재일 수밖에 없구나." 그리고 그 고백이 자기 부인의 자리로, 은혜의 자리로 데려갑니다. 절대로 유다처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반복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피로 샀으니, 너는 내 것이다." 주님 소유의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심판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인생, '
나사로'의 인생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것은 만사형통이나 문제해결이나 승승장구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온몸이 곪아 개들이 핥는 고름 속에서 남의 집 대문 앞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였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인생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점점 낮아지는 인생입니다. 세상 것이 다 털리면서도, 예수 믿는 기쁨 하나로만 살아가는 자로 빚어지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부자가 끝내 알아듣지 못한 복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