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사도행전 13:48)
안디옥의 회당 안은 조용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낭독하는 소리가 끝나자, 회당장이 일어선 이방인 출신의 랍비를 향해 말했습니다. "형제여, 백성에게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바울이 손을 들어 좌중의 시선을 모았습니다. 그가 입을 열기 전 잠시 회당을 가득 채운 침묵 속에서, 그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전체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을 거쳐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들의 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건축가가 건물을 짓기 전에 먼저 설계도를 그립니다. 설계도는 그 자체로 완전하지만, 아직 건물이 아닙니다. 누군가 설계도만 들여다보며 "이것이 집이다"라고 우기면 가족을 그 안에 살게 할 수 없습니다. 설계도는 반드시 실제 건물로 완성되어야 비로소 그 목적을 이룹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설계도입니다. 아담과의 언약, 노아와의 언약, 아브라함과의 언약, 모세를 통한 시내산 언약, 다윗과의 언약,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하나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습니다. 그 손가락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맺으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의 탄생도, 사역도, 십자가도, 부활도, 모두 "아버지의 뜻"이라는 설계도를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세워진 건물이었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낯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매 안식일마다 들어온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펼쳤습니다.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복, 사사들, 사울, 그리고 다윗, 그러다 그는 멈추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회당 안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받으신 미움도 성경의 성취였습니다. 시편 35편과 69편은 이미 수백 년 전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정죄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거절조차 성경을 응하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가장 가까운 제자의 배반도, 빌라도 앞의 재판도, 십자가 아래에서 속옷을 놓고 제비 뽑는 병사들의 손짓도, 전부 이미 씌어진 악보의 음표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오케스트라는 인간의 죄와 무지와 배신까지도 악기로 삼아 구속의 교향곡을 연주하셨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는 시편 16편을 들었습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러고는 조용히 덧붙였습니다. 다윗은 죽어 묻혀 썩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다윗 자신에 관한 말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 시를 쓸 때 자신보다 크신 분, 죽음도 붙들 수 없는 분을 미리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돌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편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였고, 이사야 55장에서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바울은 이 긴 이야기를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시켰습니다.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설계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알려줄 뿐, 그 자체로 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언약의 완성이 이루어졌습니다.
설교가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의 옷자락을 붙들며 물었습니다.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 다음 주에는 거의 온 도시가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시기로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성경, 같은 설교, 같은 날, 같은 공간, 그러나 반응은 완전히 갈렸습니다. 한쪽은 기뻐하며 믿었습니다. 다른 쪽은 박해하며 쫓아냈습니다.
바울은 이것도 성경의 성취임을 알았습니다. 하박국 1장 5절이 이미 경고했습니다.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복음을 들었으나 믿지 못하는 것도 이미 예언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믿은 자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믿음은 인간의 영리함이나 도덕적 우월함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해 짜 놓으신 언약의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순간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그 실을 건드리면, 죽어 있던 영혼이 눈을 뜹니다.
그날 안디옥을 떠나는 바울의 발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먼지를 털어 버리고 다음 도시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것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복음은 화려한 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심리적 설득 기술도, 시대에 맞는 포장도 본질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그 내용 자체에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이 사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친히 이루신 이 이야기 자체가 복음입니다.
오늘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어떤 이는 그 말씀에 마음이 열리고, 어떤 이는 귀를 닫습니다. 그 두 반응 모두 놀랍지 않습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아직 어딘가에서 이 말씀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닿을 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또 한 번 한 사람의 삶 안에서 완성됩니다. 설계도는 이미 그려졌습니다. 건물은 이미 세워졌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집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새언약(5) - 닫힌 성전의 문 앞에서 (0) | 2026.04.23 |
|---|---|
| 예수님의 비유 - 왜 못 알아들을까,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0) | 2026.04.22 |
| 기독교 - 기도 (0) | 2026.04.21 |
| 기독교 - 외식의 참된 의미 (0) | 2026.04.16 |
| 새 언약(4) - 쏟아지는 영, 한 이름으로 모이다 (0) | 2026.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