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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새 언약(7) - 십자가의 피, 그 완성된 언약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3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누가복음 22:20)

어느 유명한 작가가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은 도저히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고, 속옷까지 다 벗겨진 채 나무에 달리신 그분께,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 고백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본질을 꿰뚫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1장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율법을 손바닥처럼 꿰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것은 그들의 신학 체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저주가 복음의 심장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 아래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심판과 정죄와 저주를, 그분이 홀로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 선언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 말은 단순히 죽음을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 이후로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깨어진 모든 관계, 노아 언약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거쳐 흘러온 모든 언약의 역사가,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피, 그것이 새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이의 대학 입시가 다가오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고, 헌금도 정성껏 드렸습니다. 기도 제목은 늘 하나였습니다.
"우리 아이 좋은 대학에 붙게 해주세요."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던 날, 그녀는 감사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교회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녀에게 십자가는 소원을 들어주는 장치였습니다. 알라딘의 램프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어디 그 어머니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저주를 대신 받으셨으니, 우리는 이제 복만 받으면 된다"는 말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넘쳐납니까? 더 큰 집, 더 높은 연봉, 더 건강한 몸, 자녀의 성공, 그것들을 십자가 앞에 줄지어 내놓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24절은 쐐기를 박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눈에 보이는 것, 사람의 힘과 돈으로도 이룰 수 있는 것들은 성도의 소망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소망이라 부르지 않고, 탐심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십자가가 탐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할 때, 교회는 세상보다 더 교묘한 우상의 전당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전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1장 2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리고 바울은 덧붙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모여 함께 떡을 뗐습니다. 날마다 이 죽음을 기억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박해받고, 가진 것을 빼앗기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그들이 붙들었던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입니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있고, 영원한 기업이 있다는 그 약속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찬은 일 년에 한두 번 치르는 의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성찬의 횟수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새 언약이 무엇을 완성했는지를 전하는 설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식은 남았지만 능력은 떠났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은 새 언약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말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내려올 때, 그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사라져가는 영광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바울은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 수건이 마음을 덮은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규정과 의무와 도덕적 요구만 보는 자들의 마음 위에는 여전히 수건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오랫동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들이 두려워 짓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히브리서를 읽다가 무언가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예수님이 중보자라는 말이 갑자기 살아서 들어왔습니다.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미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수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 새 언약에는 놀라운 영광만이 아니라 엄중한 경고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9절은 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떠올려보십시오.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주인이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아들의 죽음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준도 그것입니다. 그 아들의 피, 새 언약, 이 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짓밟는 자들에게 내려질 심판은,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들이 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무겁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장치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그 기준이 세워진 자리입니다.

속옷까지 벗겨진 주님께 이 세상의 무엇을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그분 자신입니다. 그분의 살과 피, 그분의 생명, 그 안에 담긴 영원한 기업, 그것이 새 언약이 우리에게 주는 전부이자 전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자들의 사명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완성된 새 언약을,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변명하지 않고, 희석하지 않고, 세상의 욕망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그 피만이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 받으시는 자리이며, 죄인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수건은 벗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수건이 벗겨진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새 언약이 우리에게 약속한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