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누가복음 16:27~31)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하던 한 집사님이 어느 날 갑자기 예배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몇 주 후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분이 어느 유명한 부흥사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방언을 받고, 그 집회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분을 우연히 만났을 때, 그 눈빛은 전과 달리 뜨겁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 이제 성령을 받았어요. 방언도 하고, 예언도 받았어요. 이제야 신앙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그분이 나쁜 사람이어서 그런 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던 무언가가 있었고, 눈에 보이는 확신, 손에 잡히는 체험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갈망 자체가 문제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갈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지옥에 있는 부자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살려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간청합니다. 죽은 자가 나타나면 그들이 믿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 간청 속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 있어야 사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강렬한 체험이 주어지면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기적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을 구원합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하나의 오래된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날,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그 장면이 선명하게 펼쳐집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오래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아론에게 몰려가 소리쳤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그들이 만들어낸 것은 금송아지였습니다. 그리고는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이 장면에서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우리의 신, 신앙처럼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의 안전과 성공과 미래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종교는 신을 달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시스템입니다. 신은 수단이고, 목적은 '나'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는 "신은 인간 욕망의 투사다"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을 계속 조작해낸다는 것입니다.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 욕망을 믿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 종교의 가장 세련된 형태가 오늘날 어떤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화려한 무대, 열광적인 찬양, 병을 고쳐주고 예언을 해주는 강사,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만, 그 부름의 중심에 있는 것은 치유받고 싶은 '나', 축복받고 싶은 '나', 확신을 얻고 싶은 '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그 날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교만한 자기 숭배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가 그 대답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던 시절, 사람들은 시날 평지에 모여 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 선언에도 '우리'가 반복됩니다. 하나님 없이도 하늘에 닿겠다는 것, 하나님 없이도 이름을 남기겠다는 것이 인간의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교만에 진노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바로 어제까지 같은 말을 쓰던 사람들이 갑자기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방언의 기원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소통이 끊긴 세계, 방언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사야서 28장은 이 심판의 의미를 더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교만이 면류관이 된 북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그들은 선지자의 말을 조롱했습니다.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이건 뜻있는 말이 아닙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중얼거리는 헛소리, 아이를 놀릴 때 내는 의미 없는 소리입니다. 쉽게 말하면 "쏼라 쏼라"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방언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복음을 방언처럼 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앗수르라는 진짜 방언을 보내어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히 방언으로만 들리게 하십니다. 그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이사야서 28장 16절이 선언하는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입니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 자체가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됩니다. 십자가는 그들에게도 방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역사 속에 새겨진 두 장면을 나란히 놓고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장면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온 지 오십 일째 되던 날, 구약의 오순절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 삼천 명이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도륙당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실상은 자기 자신을 섬기던 자들이 칼 아래 죽은 날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오십 일째 되던 날, 신약의 오순절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열다섯 개국에서 온 디아스포라들이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알아듣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세례를 받습니다.
두 오순절을 겹쳐 보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됩니다. 구약의 오순절에 자기 숭배의 죄로 죽은 삼천이, 신약의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살아난 삼천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야 했던 부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천국의 '나사로(하나님이 도우셨다)'가 된 것입니다.
그 삼천 명이 살아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사도행전 2장 41절은 말합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거기서 '말'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오순절에 일어난 방언의 사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동안 세상에게 방언처럼 들리던 하나님의 복음이, 성령의 임하심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 된 것입니다. 바벨에서 시작된 심판의 방언이 오순절의 은혜로 풀린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방언의 의미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그 현장이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린도는 헬라의 항구도시였습니다. 온갖 신비종교가 넘쳐나고 신비한 체험과 황홀경이 영성의 증거로 여겨지던 곳이었습니다. 그 문화적 토양 위에 세워진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과 예언과 신유가 영성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고, 못하는 사람은 덜 된 신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통해 하려는 말은 분명합니다.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교회가 깨닫도록 돕기 위한 하나님의 한시적 선물입니다. 어떤 개인의 능력을 자랑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꽹과리 소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시끄럽고 요란합니다. 사람의 이목을 끕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용이 없는 소음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지 않은 자의 방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리 신기하고 신통해 보여도, 그것은 영적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믿음이 있을지라도, 자기 몸을 불사를 희생을 바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선언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하고, 전 재산을 구제에 쏟아붓고,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가도, 그것이 십자가 복음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개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부자의 자기자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유통기한을 분명히 말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 초대 교회 때 방언과 예언이 주어진 것은 아직 성경 정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과도기 동안 방언과 예언이라는 계시적 도구를 통해 교회에 당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그 한시적 도구들이 필요 없어집니다. 지도가 완성되면 별자리로 방향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방언을 어린아이 때의 것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방언과 예언에 의존하는 것은 영적 유아기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교회에서는 그것이 완전히 역전되어 있습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이 영적 어른이고, 못하는 사람이 어린아이 취급을 받습니다. 아기가 옹알이를 하는데 그 아기 엄마가 "참 멋진 은사네요, 부러워요"하고 있는 꼴입니다.
교회사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사도시대 이후 기적과 방언은 교회에서 사라졌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아래 카타콤에서 신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는 동안, 교회에는 화려한 기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만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이 제국을 뒤집었습니다.
그런데 AD 4세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부터 다시 기적과 신비한 은사들이 교회 안에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핍박받던 자리에서 권력을 쥔 자리로 올라서자, '보이는 것이 진짜이고 경험이 진리'라는 힘의 원리가 복음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흐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강신무들이 예배당 안에서 선지자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못 알아듣습니까? 세상이 복음을 못 알아듣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입니다. 바벨탑 이후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이 방언처럼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힘의 원리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인데,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에게 영원히 방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그 방언이 들립니다. 죽음이 생명이 되고, 약함이 능력이 되고, 패배가 승리가 되는 그 역설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신약 오순절의 기적입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 로마 교회 전체와 싸워야 했습니다. 황제도 교황도 모두 그를 향해 칼을 겨눴습니다. 그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출석하여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세상에게 방언이었습니다. 미친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방언이 유럽을 뒤흔들었습니다. 성령이 그 방언을 통역하셨기 때문입니다.
본회퍼가 히틀러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면서 쓴 글들이 있습니다. 그 글 속에서 그는 세상의 중심에서 고난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썼습니다. 그것은 힘을 숭배하는 나치 독일에게는 완전한 방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언이 수십 년이 지난 후 세계 교회를 깨웠습니다. 성령이 통역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은 그것을 방언으로 듣습니다. 조롱하고 외면하고 때로는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방언의 통역자입니다. 심판과 저주의 방언이었던 십자가를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방언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신기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은사가 아니라, 세상에게는 영원히 방언일 수밖에 없는 십자가 복음을 내가 이해하게 된 것, 그것이 진짜 은사입니다. 방언을 못 하시는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음이 들리는 사람, 그 사람이 이미 성령의 통역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세상에게 방언일 뿐인 하나님의 복음을 이해하고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진짜 방언하는 자들이요, 진짜 통변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며, 진짜 예언을 하는 자들입니다. 교회에서 외쳐야 할 유일한 방언이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라.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들라."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누가복음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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