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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십자가(2) - 미련한 십자가, 그 뒤집힌 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1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18~25)

어느 날 한 철학과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서며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어떤 존재여야 하겠습니까?" 학생들의 대답은 예상대로였습니다. 전능해야 합니다. 완전해야 합니다. 고통이나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야 합니다. 그때 누군가 덧붙였습니다. "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신이라면 그런 굴욕을 당할 리 없습니다." 교수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강한 것을 원합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하면 주변의 힘을 빌리고, 그래도 모자라면 신의 힘을 빌리려 합니다. 정성을 쏟고,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의 목적지는 결국 한 곳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방향이 정반대였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뜻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권력의 정점에서 나온 선언이 아니라, 나무에 달려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던 순간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 교회는 심각한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게바파다." 저마다 자기가 더 훌륭한 지도자에게 배웠다고 자랑하며 갈라져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나는 어느 신학교 출신이다", "나는 어느 유명한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식의 자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상황을 보며 문제는 십자가의 도를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핵심을 짚어냅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안다면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자랑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이 미련하고 거리끼는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만 충격적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단 한 톨도 개입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복음이 세상의 지혜와 잘 맞아떨어지는 방식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
내가 영리하게 이해했기 때문이야." 혹은 "내가 열심히 선행을 쌓았기 때문이야." 그러면 구원은 인간의 능력과 노력의 산물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는 보조 수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에 구원의 문을 달아두셨습니다. 십자가라는 문입니다. 인과율로도, 철학으로도, 도덕적 업적으로도 열리지 않는 그 문입니다. 세상은 인과율 위에 서 있습니다. 선행에는 보상이, 악행에는 벌이 따릅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동화 속 권선징악이 이 원리를 가르쳐왔습니다. 종교조차 대부분 이 틀 안에서 작동합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나쁘게 살면 벌을 받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 납득할 수 있는 신의 문법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문법을 완전히 뒤집어버립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곁에는 두 명의 강도가 달려 있었습니다. 평생 강도질을 하며 살다가 사형을 앞둔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그러자 주님은 답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세상의 지혜로 말이 됩니까? 평생 율법을 지키며 금식하고 전도한 사람보다, 마지막 한 마디를 고백한 강도가 먼저 낙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납득 불가능함 속에 복음의 본질이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축적된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율법의 조문 하나하나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고, 십일조를 꼼꼼히 냈으며, 공개적으로 기도하고 금식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라면 가장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가 세상의 지혜와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의 도덕적 역량을 믿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말합니다. 인간의 가장 훌륭한 도덕적 노력조차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십자가를 믿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그 부르심 없이는 아무도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영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이 남들보다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이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파벌을 내세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의 도를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안에서 남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 날이 갈수록 나는 작아지고 그리스도만 커지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도가 삶 안에서 익어가는 방식입니다.

그 강의실로 교수는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그 질문을 품고 살았다고 합니다. 신이라면 십자가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깨달았습니다. 강한 신이라면 굳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신이라면, 그 사랑이 충분히 크다면, 기꺼이 그 자리에 내려올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 강자의 논리로는 실패처럼 보이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