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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여, 자유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13.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 7:14~23)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남몰래 이웃을 도왔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집에 익명으로 생활비를 넣어주고, 홀로 사는 노인의 장을 대신 봐주었으며, 아무도 모르게 교회 청소를 도맡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교회 주보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목사님이 설교 중에 그를 언급하며 칭찬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뿌듯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서 또 다른 선행을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
나는 선한 사람이다. 나는 다르다.' 그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짧고 단순해 보이는 말씀 하나를 하십니다. "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한 위생 지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선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실체를 아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깊은 자유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어떤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를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외적 조건으로 사람을 재는 눈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놀랐습니다. "
도대체 이 지혜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러나 그 놀라움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외적 조건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아무리 탁월한 지혜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런 눈을 갖고 삽니다. 어느 교회 교인이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설교는 참 좋은데, 신학교가 좀 아쉽지 않아요?" 설교의 내용보다 졸업한 학교가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 조건이 내용을 덮어버리는 것이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인간의 눈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을 보신 예수님이 "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도 당황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 쓰인 헬라어 '다우마조'는 '찬양하다, 칭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황하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거부하는 죄인들 앞에서 무력하게 서신 그 모든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시며 찬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구원은 정확히 그런 방식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가능함이 드러난 그 자리에, 예수님의 무력함처럼 보이는 십자가 지심이 겹쳐지면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설득으로도, 교훈으로도, 훈련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그 무력한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두번째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살인하는 마음입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그 다음에 등장합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의 말을 달게 들었고, 큰 번민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를 죽였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누군가 모임에서 지인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속으로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체면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
제가 틀렸습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내 존재의 가치를 훼손할 것 같은 두려움이 그 말을 막습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것은 바로 이 두려움이었습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와 위상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존재의 존재성을 수호하는 데 목숨을 겁니다. 자신의 존재성에 조금이라도 흠이 될 것 같은 것은 무엇이든 삭제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 합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아숭배에 빠진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헤롯 안에 우리가 들어 있습니다.

세번째는, 생존의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복음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제자들은 현실적이었습니다. 무리가 배고프니 먹여야 했고, 해결책은 단 하나였습니다. 무리를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내어놓은 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전부입니다"라는 답변이었습니다. 그것이 생존의 눈으로 복음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했습니다. 집세가 밀리고, 카드 빚이 쌓이고, 아이 분유 살 돈조차 아슬아슬했습니다. 그때 교회에서 성경 공부가 시작되었고, 목사님이 "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필요가 채워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이 지금 우리 통장 잔액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복음이 오병이어처럼 보였습니다. 수만 명을 먹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오병이어를 축복하셔서 수만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급의 기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
너희에게 지금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것이 사실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다.'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앞에서 베드로는 망설이지 않고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생존의 눈이 걷히자, 오병이어가 은금보다 귀한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네번째는, 사유화된 능력이 사람을 물에 빠뜨립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 후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 산에 올라가 밤 사경까지 그들을 지켜보십니다.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 풍랑 속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다가가십니다. 제자들은 외칩니다. "
유령이다!" 풍랑이라는 육적 현실에 묶여 있는 눈에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유령처럼 보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
명하시면 물 위로 걷겠습니다" 하자 주님이 "오라" 하십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는 순간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왜 빠졌을까요? 물 위를 걷는 능력이 베드로 안에 사유화되어 그의 것이 되었다면, 바람이 불어도 걸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처음부터 베드로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오라"는 주님의 말씀 안에 있었기 때문에 걸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초창기 사역에서 수많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병자가 낫고, 상황이 열리고,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기도에 조금씩 이런 말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
주님, 저는 당신이 쓰시는 그릇입니다. 저를 통해 이 민족을 살려주십시오." 들으면 겸손한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 속에는 '나는 특별히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역이 막히고 상황이 어두워지자,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다는 공허함에 사로잡혔습니다. 능력이 자기 것이 된 줄 알았는데, 그 능력이 사라지자 자기도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에 빠진 상태입니다.

믿음도, 성숙도, 능력도 우리 안에 사유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나는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남들보다 잘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물에 빠진 상태입니다. 반면에 "나는 이렇게 늘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자구나"를 깨닫는 것이 물 위를 걷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섯번째는,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사건의 흐름 위에서 게네사렛 사건이 등장하고, 오늘 본문에 이릅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예수님은 고르반의 예를 드십니다. 유대인들은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
고르반,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고 선언해 버리면 부모 공양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드리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고작 이 정도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입니다. 음식이 배 속을 통과해 나가는 동안 마음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처럼,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도, 선행도, 종교적 헌신도 인간의 더러움과 깨끗함의 판정에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인간의 마음은 날 때부터 더럽기 때문에 그 어떤 외부적 행위로도 청소되지 않습니다. 서두에 등장했던 그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익명으로 선행을 하다가 이름이 알려지자 뿌듯함을 느끼고, 이후에는 더 잘 보이는 자리에서 선행을 했던 그 사람 말입니다. 그에게서 나온 것은 선행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선행은 그것을 포장하는 껍데기였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
악한 생각,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라고 하십니다. 이 목록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라는 존재를 중심에 놓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죄의 뿌리는 자기숭배입니다.

여섯번째는, 마음을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 가지 행위를 개선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조금 더 착하게 사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마음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런데 그 마음은 우리가 훈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서는 선언합니다. "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옛 마음을 제하시고 새 마음을 심어 주십니다. 그것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미 일어난 일로 선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 복음을 믿는 자들은 이미 새 마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 마음 자체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 쳐 주십니다. 요한계시록은 말합니다. "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성도들이 행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 하나님 앞에 올려집니다.

일곱번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 바로 앞에는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바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곧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될 것이라 믿고 그것을 쌓아가느라 지쳐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새벽 기도를 거른 적이 없었고, 헌금 생활도 빠짐없었으며, 봉사도 모범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더 잘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려면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신앙이 기쁨이 아니라 끝없이 쌓아야 하는 빚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분에게 신앙은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온유와 겸손을 배워 그것을 내어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은혜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때 율법의 짐에서 벗어나 예수의 멍에를 멘 자가 됩니다. 예수의 멍에는 쉽고, 예수의 짐은 가볍습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을 직시하십시오. 오늘도 고백합니다. 공짜로 주겠다는 것을 사양했던 그 행위가 하나님께 칭찬받을 업적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도 자기 자랑을 챙기려 했던 '
'를 보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은 선행처럼 보일 때조차도, 자기를 높이려는 더러운 마음이 그 안에 얼마든지 섞여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선한 행위 속에서도 자기의 영광을 챙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붙드는 것, 그 자각 속에서 십자가의 필연성이 한 발 더 가까이 각인됩니다. 우리가 행위를 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붙들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성인군자로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삶에 고난이 닥쳤다고 '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적과 능력을 갈망하느라 지쳐가지 마십시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새 마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마음을 새것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당신, 자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