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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기독교 - 외식의 참된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6.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1)

어느 날 한 남자가 교회 봉사 활동으로 홀몸 어르신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반찬을 챙겨 가고, 밀린 청소도 해드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SNS에 사진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봉사 현장 사진과 함께 짤막한 소감을 적었고, '
좋아요'가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그의 마음은 더욱 뿌듯해졌습니다.

그는 선한 일을 했습니까? 겉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겉과 속이 달랐습니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돕고 싶었고, 실제로 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이 장면을 보시며 무어라 하실까요?

우리는 오래전부터 외식을
"겉과 속이 다른 것"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그러나 그 정의만으로는 뭔가 허전합니다. 자고 싶어도 억지로 일어나 출근하는 것도 겉과 속이 다릅니다. 속으로는 미워 죽겠는데 꾹 참고 미소로 대하는 것도 겉과 속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외식이라 하지 않고 성실, 인내, 경건의 연습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외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세리의 친구가 되셨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셨으며, 십자가 위의 강도에게까지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유독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불같은 진노를 퍼부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저주의 말까지 그들에게 쏟아 내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 대상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율법 한 조항도 허투루 넘기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왜 그토록 격렬하게 분노하셨을까요?

죄를 행동의 목록으로만 이해하면 외식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경향으로 이해하면 전혀 다른 풍경이 열립니다. 죄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아,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며, 스스로 왕 노릇 하려는 경향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그 경향이 죄의 뿌리입니다. 외식이란 바로 그 경향에서 출발한 종교행위입니다.

따뜻해 보이는 봉사, 경건해 보이는 기도, 눈물겨운 금식도 만약 그 출발점이 "
나를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이라면, 성경은 그것을 외식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리켜 '자기 의'라고도 합니다. 겉으로는 선해 보여도 지옥으로 향하는 급행열차 티켓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에서 바리새인들을 "
평토장한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반듯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안은 썩은 시체 냄새와 부패한 물로 가득 찬 무덤입니다. 그들의 경건한 외양 안에 실제로 무엇이 가득 차 있었는지를 예수님은 꿰뚫어 보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종교행위를 예로 드십니다. 첫 번째는 구제입니다. 몇 해 전, 어느 대형 교회에서 수재민 구호를 위한 헌금을 모금했습니다. 꽤 큰 금액이 모였고, 전달식이 열렸습니다. 사진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댔고, 교회 이름이 새겨진 현수막 앞에서 대표자들이 환하게 웃으며 수표를 건넸습니다. 그 장면이 교회 주보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물론 그 돈은 수재민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들의 박수와 인정, 그것이 이미 그들이 원하던 보상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따로 갚아 주실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운 마음이 진심이었더라도, 그 행위의 의도가 사람의 칭찬을 향해 있었다면 그것이 외식입니다. 겉과 속의 일치 여부가 아니라, 그 ''이 누구를 향해 있느냐가 기준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어느 교회에 기도로 유명한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가장 먼저 나와 가장 늦게 떠났고, 그의 기도 소리는 예배당을 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는 흔쾌히 응했습니다. 그리고 종종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내가 기도해 드릴게요. 저한테 기도받으면 응답이 잘 돼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보장할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목적도 계획도 없이 사람의 열심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분이라는 말이 됩니다. 기도를 자랑하는 순간, 그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시면 가망이 없습니다"라는 간청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밥 많이 먹고 힘내서 하면 됩니다. 기도는 내가 끝에 다다랐을 때, 그 끝에서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는 행위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 오르신 사이, 산 아래 남은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내려오시자 그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느니라."

이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봐라, 기도를 열심히 하면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으려 할 때, 과연 기도를 한 번도 안 했겠습니까? 그들이 기도를 안 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기도가 아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 없이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를 사용했으니, 그건 이미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한 것은 기도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나는 무익한 종이며 하나님만이 만유의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을 전제합니다. 그 고백 없이 드려지는 기도는, 아무리 간절하고 길어도, 허공에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세 번째는 금식입니다. 기도원에 가면 가끔 이런 풍경을 봅니다. 한쪽 구석에 담요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있습니다. 옆 사람이 "
저 나흘째야"라고 하자, 다른 사람이 "겨우? 나는 일주일인데"라고 받아칩니다. 그때 담요가 스르르 걷히며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 나타나 중얼거립니다. "가소롭군, 난 사십 일." 금식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적어도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는 분명히 보여 줍니다. 밥을 굶어 하나님을 협박하여 응답을 받아내는 것은 금식이 아니라 자해입니다. 금식은 "
이 문제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밥 많이 먹고 힘을 내야지, 왜 굶겠습니까? 금식은 이 땅의 양식을 내려놓음으로써 "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만을 나의 양식으로 삼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8장이 말하는 참된 금식에는 반드시 열매가 따라옵니다. 이 땅의 것을 내려놓은 자는 자연스럽게 가난한 자를 섬기고, 억눌린 자를 풀어주며,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줍니다. 금식이 진짜라면, 그 사람의 손이 열립니다.

반면 "
난 일주일 굶었는데 넌 왜 한 끼도 못 굶냐?"는 말은, 금식을 자기 자랑의 근거로 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식이 아니라, 금식이라는 포장지를 두른 외식입니다.

세 가지 예를 살펴보고 나면, 외식의 정체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외식이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어 자기 생색에 쓰는 것이 외식입니다.

그리고 외식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따라오는 습관이 있습니다. 남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가 빛나려면 다른 사람의 잘못이 더 크게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
난 새벽기도 빠진 적 없는데, 목사님은 왜 빠지십니까?" 이런 질책은 대개 신앙의 열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이것을 가리켜 형제의 눈 속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장로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장로가 새벽기도 빠진다고 욕먹을까봐요." 그분은 새벽마다 이를 갈며 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이를 갈며 새벽기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된 사람이 또 다른 율법으로 자기를 묶어 놓고, 그 묶음으로 남까지 묶으려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으로 돌아갑니다. 유다와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그들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 빛을 잡으러 오는 자들이 들고 나온 것이 횃불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체포 기록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횃불은 빛을 잃습니다. 대낮에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초라해집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이 고침을 받는 순간,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들이 가려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
저 태양만 없으면 내 횃불이 훨씬 밝아 보일 텐데."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진짜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였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빛이 바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솔직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날 때, 나는 무엇을 느낍니까? 배우고 싶다는 의욕입니까, 아니면 불편한 감정입니까? 누군가 칭찬을 받을 때, 나는 함께 기뻐합니까, 아니면 속으로 그의 흠을 찾습니까?

만약 내가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내 횃불 빛이 바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는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켰으나 결국 메시아를 죽인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던 죄인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던 자가 이제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자로 바뀌는 것,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자리에서 드리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만이 외식이 아닙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결국 빛이신 예수님을 잡으러 나선 횃불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손에는 지금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