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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기독교 - 기적을 구하는 마음, 영광을 놓치는 눈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8.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한복음 2:11)

사람들은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기적을 경험하고, 응답을 받고,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나는 종교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체험과, 성경이 말하는 체험은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기적을 원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 요청은 겸손한 구도가 아니었습니다. 믿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해 믿지 않으려는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기적을 요구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기 확증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셔야 믿겠다는 태도, 내 삶이 편안해지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신앙이 의미 있어진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체험은 전혀 다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환난과 고난 한복판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왜 나는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을까?’ ‘어째서 이 고통 속에서도 소망이 남아 있을까?’ 그 질문이 바로 참된 체험의 시작입니다.

바울이 말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너무 자주, 너무 가볍게 사용됩니다. 성공을 응원하는 문구처럼, 원하는 목표를 이루게 해 주는 주문처럼 소비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쓰인 자리를 우리는 잊어버립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 안에서 이 말을 썼습니다. 자유도, 명예도, 안전도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말합니다.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 속에서 하나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 비결은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안에 머물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신앙은 기분이나 느낌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느낌은 언제나 우리를 속입니다. 철로 만든 거대한 배가 물 위에 뜬다는 사실은 느낌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웁니다. 부력을, 원리를, 법칙을, 이해가 생기면, 그제야 마음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정확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먼저이고, 그 이해가 가슴으로 내려올 때 신앙은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도 기적을 행하셨고, 사도들도 기적을 행했으니 오늘날도 하나님은 기적으로 일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니 믿기만 하면 병도 낫고, 물질도 채워지고, 삶도 형통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번도 기적이 인간을 변화시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은 변하지 않았고, 오병이어를 먹고 배부른 무리는 예수를 떠났습니다.

기적은 목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표지(sign)입니다. 그 표지는 언제나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분이 누구신가?” “이분이 무엇을 하실 분인가?” 요한복음은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며,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합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을 잔치의 위기를 해결한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여섯 항아리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한 항아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항아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형식은 남아 있었지만, 생명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물은 포도주가 되고, 잔치는 비로소 잔치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만 참된 기쁨과 풍성이 시작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역풍을 만납니다. 열심히 노를 젓지만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성경은 묘하게 말합니다.
“지나가려고 하셨다.” 하나님이 지나가신다는 표현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사용됩니다. 광야에서, 산에서, 폭풍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은 안전한 자리에서보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사업의 실패, 병, 관계의 무너짐,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죄의 역풍, 그 모든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이미 함께 계시며, 자연법칙을 초월하신 능력으로 다가오십니다. 함께 계신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에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랄프 카이퍼는 눈이 나빴습니다. 수십 년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지만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질문하십니다.
“네 눈이 나아지는 것과 내 영광이 네 삶에 드러나는 것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강해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의지하게 하시고, 우리는 빛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겸손하게 하십니다. 기적은 문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게 하는 창입니다.

소경이 보게 되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기적은 마지막에 십자가로 향합니다. 모든 표지는 결국 한곳을 가리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 기독교의 기적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통과이며, 문제 해결이 아니라 존재 변화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표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표적,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그 표적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엎드리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참된 체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적은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기 위해 주어진 표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20: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