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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 뱀처럼, 비둘기처럼, 양처럼, 예수처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4.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단 하나도 보호장비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돈도, 여벌 옷도, 지팡이도 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양과 같도다.” 세상은 이리인데, 제자들은 양입니다. 이 비유는 처음부터 전도의 성공 가능성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패와 상실, 그리고 죽음을 전제합니다. 전도는 세상을 이기는 전략이 아니라, 세상 앞에서 죽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나는 자식을 사랑한다.”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나는 이 일을, 이 명예를, 이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그 사랑의 주어가 누구냐고, 자식도, 부모도, 재산도, 명예도 결국은 모두 ‘나’라는 존재의 확장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과 무관한 대상을 객관적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만족, 내 기쁨, 내 안정, 내 의미가 보장될 때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확장된 ‘나’를 건드리실 때, 인간은 하나님조차 원수로 돌립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생명’은 단순한 육체가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쌓아 올린 모든 울타리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이 말은 자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으로 작동하던 삶의 구조가 해체되는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자식, 관계, 명예, 재물, 건강, 미래라는 이름의 울타리를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그건 잔인함이 아니라 구원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이 검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검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세워진 모든 바벨탑을 무너뜨리는 검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먼저 이루어질 때만 인간 사이의 참된 화평이 가능합니다. 그 전의 평화는 언제나 바벨탑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자신을 봅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의의 세련된 관리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완전한 상실 앞에서 인간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그때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버림받은 자요, 하나님께 매달리는 자는 택함 받은 자입니다. 구원은 결심이 아니라 항복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동의 문제입니다. 세상 가치가 작동하는 방향에서 하나님의 은혜만 작동하는 방향으로 삶 전체가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을 들은 사람의 첫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죄인 됨의 자각입니다. “나는 예수를 죽인 자입니다.” “오늘도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입니다.” 이 고백 없이는 은혜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자나 독수리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전도는 설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가르기입니다. 양은 이리 앞에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누가 세상에 속했는지, 누가 하나님께 속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전도는 언제나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일으킵니다.

뱀처럼 지혜롭다는 것은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지혜입니다. 에덴의 유혹을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다는 것은 세상의 죽은 고기에 시선을 주지 않는 순종입니다. 양은 끝까지 양이어야 합니다. 사자로 변신하려는 순간, 복음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결국 가장 완벽한 양으로 오셨습니다. 이리 떼 앞에서 도망치지 않으셨고, 변신하지 않으셨고, 설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먹히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세상은 심판받았고, 택한 자들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더 나은 내가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조용히, 그러나 철저히 죽임을 당하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언제나 약해 보이고, 손해 같고, 막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봅니다. 뱀처럼, 비둘기처럼, 양처럼, 그리고 결국, 예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