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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 양은 창세전부터 양이고 염소는 창세전부터 염소일 뿐이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9.

마태복음 25장 31~46절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태복음 25:34)


오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우리를 정면으로 겨누는 자리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부와 성공, 건강과 형통을 하나님의 복의 증거로 삼아 버리면
가난함과 실패, 병듦과 연약함은 자동으로 저주·믿음 없음·패배로 해석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율법의 눈, 선악과의 세계관으로 사람과 사건을 재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말하면서도 연약한 자를 품지 못하고, 무너진 자를 정죄하며, 실패한 형제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왜입니까? 그 연약함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체를 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염소의 문제는
‘행함이 없음’이 아닙니다. 본문의 염소들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을 보았는데 돌보지 않았습니까?” 이 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연약한 자 안에서, 실패한 자 안에서, 죄인과 무너진 자 안에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하나님은 항상 강한 모습, 성공한 모습, 이긴 모습으로만 상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구유에 누이신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에서 패배하신 하나님이시며, 저주받은 자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하나님이십니다. 염소들은 그 하나님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양의 행함은
‘선행 목록’이 아닙니다. 양들은 놀랍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이 말은 겸손한 연출이 아닙니다. 정말로 의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의 중심에는 “내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연약한 자가 곧 과거의 나였고 무너진 자가 곧 내 실존이었으며 갇힌 자가 곧 죄 아래 있던 나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대할 때 판단이 아니라 기억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 저 자리에 내가 있었지.” “아, 저 꼴을 주님이 대신 당하셨지.” 그 기억이 곧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가 된 것입니다.

양의 삶에서 드러나는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 더 정확히 말하면 은혜를 알아버린 자에게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세계관의 흔적입니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했으니 양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행위에 대한 자의식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선행을 업적으로 축적하지 않았고, 구제를 신앙의 자산으로 계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염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역시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는 했어야 할 사람들인데,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즉, 자기 가능성에 대한 신뢰, 자기 의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염소들의 문제는 선행의
‘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자기 존재를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신을 가능성 있는 존재로 붙들고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어도 뭔가 해낼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의 갈림은 행위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존재 이해의 차이, 자기 인식의 차이, 은혜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입니다. 양은 이렇게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주님이 다 하셨다.” 염소는 이렇게 말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못 했을 뿐이지, 할 수는 있었던 존재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이 차이가 영원을 가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착한 일을 많이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누구인지를 똑바로 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양은 끝까지 양답게 삽니다. 연약함 속에서 은혜를 배우고, 무능 속에서 십자가를 붙들며, 자기 부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염소는 끝까지 염소답게 삽니다. 강함을 추구하고, 성과를 신앙으로 착각하며, 자기 확신 속에서 하나님을 심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은 새로운 판결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정체성을 선언하실 뿐입니다.
“너는 양이었다.” “너는 염소였다.” 그 선언이 바로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비유를 듣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연약함 속에서 은혜를 붙드는 성도가 아닙니다.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자기 신앙이 여전히 성과, 열심, 헌신, 도덕성으로 설명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연약함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염소의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주여, 은혜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면 그 자리가 바로 양의 자리입니다. 양은 완벽해서 양이 된 것이 아닙니다. 양은 어린양 안에 있었기 때문에 양이 된 것입니다.

양은 창세전부터 양이었고 염소는 창세전부터 염소였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더 잘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너는 어디에 속해 있느냐”, “너의 구원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도 자기 부인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현실로 사는 자들, 그들이 바로 보좌 우편에 설 양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주어진 길은 단 하나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자기를 증명하려 애쓰지 말고 자기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더 잘하려 애쓰지 말고 더 의로워 보이려 하지 말고 더 성공적인 신앙인이 되려 하지 말고 그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기 삶 속에서 계속 확인해 가면 됩니다.

그게 믿음이고 그게 자기 십자가이며 그게 양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복음은 이것입니다. 천국은 착한 사람의 상급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양은 자랑할 것이 없고 염소는 끝내 항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기부인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시는 그 은혜 앞에 잠잠히 서는 것이 성도의 복인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에베소서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