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로마서 8:9~10)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라.” 과거 어느 기도원의 강대상 위에 걸려 있던 그 문구는 아직도 우리 눈에 선명할 것입니다. 그 아래에는 병을 고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삶의 고통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빽빽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은 간절했습니다.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조금 더 이 땅에서 오래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원 원장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장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점심 집회에서 모인 헌금을 계수하며 값비싼 반지와 시계를 서로 쳐다보고 있는 모습, 그 광경 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대신 “어떻게든 낫고 싶다”는 인간의 절박함과, 그것을 이용하는 종교 시스템만 있었습니다.
그날 집회에서는 “암 환자가 나았다”, “불치병이 고침 받았다”는 간증이 이어졌습니다. 다리를 절던 사람이 뛰고, 휠체어에 앉아 있던 노인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것을 모두 성령의 역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에는 한 가지 질문이 남았습니다. “만약 오늘 하나님이 이 사람을 부르신다면, 그는 찬송하며 갈 수 있을까?” 병이 낫는 것과 구원은 같지 않습니다. 기적과 복음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집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한 사람이 갑자기 몸을 떨며 춤을 추기 시작하면, 마치 전염병처럼 회중 전체가 춤을 추었습니다. 누군가 웃기 시작하면, 설명할 수 없는 웃음이 예배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성무”, “성령의 웃음”, “성령의 임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모든 현상은 불교 집회, 무속 의식, 심지어 최면 집단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한국의 한 유명한 사찰에서는, 기독교 은사집회와 거의 동일한 형태의 집회가 열립니다. 안수하고, 방언처럼 들리는 소리를 내고, 병이 낫는 사례가 보고됩니다. 단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부처의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현상이 일어나면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역사’이고 절에서는 ‘악령의 역사’입니까? 아니면, 애초에 현상 자체가 성령의 기준이 아닌 것일까요?
세례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가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연합입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이제 나는 다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라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것.” 이 ‘함께’라는 단어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와 연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었지만, 죄인인 우리를 대표하여 죄인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내포적 대신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학급 전체를 대표해 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처럼, 예수님은 인류 전체를 품에 안고 하나님의 심판 앞으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늘 심판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노아 홍수, 홍해, 요단강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죽음의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방주입니다. 물은 모든 것을 삼켜 죽이지만, 방주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 물이 오히려 구원의 힘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는 저주의 물을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 안에 들어가면, 그 물은 더 이상 우리를 죽이지 못합니다.
불은 성경에서 심판과 정결을 상징합니다. 불은 생명이 아닌 것을 태워 없앱니다. 성령은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불로 태워 없애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이 불과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나중에 더 능력 있게 받는 ‘업그레이드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오순절은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날입니다. 죄의 종이었던 자들에게 자유가 선포된 날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한 번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미 교회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오순절”, “두 번째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와 계신 분을 다시 찾지 마십시오.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새로운 성령을 받으러 다니는 삶이 아니라, 이미 계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태우시고, 익사시키시는 작업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말씀 앞에서 자아가 죽고, 십자가 앞에서 자랑이 불타고, 은혜 앞에서 모든 공로가 잠기는 삶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엉뚱한 성령세례를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대신 말씀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거기에서 진짜 성령의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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