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5~6)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흔히 “해방의 사건”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건을 인간의 투쟁이나 민족적 독립운동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출애굽은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곧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구속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그저 “등 따시고 배부르며 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고단하긴 했지만, 그 나름의 일상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그들의 삶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도록 몰아가셨습니다. 고통이 깊어졌을 때에야 그들은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신 이유는 그들의 간절함이 아니라, 당신의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출 2:24) 하나님은 감정에 휘둘리는 분이 아니라,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처소”로 삼기 위해 구속하셨습니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출 15: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가 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나를 위한 하나님’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는 백성’이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늘 구원을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합니다. “이 세상은 힘드니 천국은 좀 편했으면 좋겠다.” “고난은 싫고, 축복은 많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속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서도 여전히 내가 주인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천국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아닌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의 연장일 뿐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 장면은 매우 엄숙합니다. 제단이 세워지고, 소를 잡고, 피가 뿌려집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이 언약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약속이 아닙니다. 생명을 건 언약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하겠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형식은 상호적이었지만, 그 속에는 이미 실패가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물든 인간은 스스로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결혼식장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하는 두 사람과 같습니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닐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말이 얼마나 연약한지 드러납니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돌판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말 속에 우상숭배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는 신이 아니라,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금송아지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형상을 입은 결과물입니다.
풍요, 안정, 성공, 통제 가능한 신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그 금송아지를 이렇게 부릅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이것이 가장 무서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신입니다.
오늘날 번영신학이 바로 이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잘 되었다, 성공했다,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이 복음의 핵심인 것처럼 소비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언제나 “자기 부인”에서 시작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 고난 없는 축복은 금송아지 앞에서의 잔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며 그 광경을 봅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언약의 돌판을 깨뜨립니다. 이 행동은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중보자의 절규였습니다. 만약 돌판이 깨지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언약 파기의 책임으로 모두 멸망당해야 했습니다. 돌판의 깨어짐은 말씀의 깨어짐이고, 이것은 장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깨어지실 사건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율법 앞에 서면 우리는 모두 정죄받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살 길이 열립니다. 그분이 대신 깨어지셨기 때문입니다.
모세 언약은 인간의 죄를 폭로합니다. 동시에, 은혜 언약의 필요성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예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시는 삶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종교생활인가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부서진 사람만이, 참된 언약의 은혜를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를, 성공이 아니라 주님의 깨어짐을, 금송아지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입니다. 이것이 모세 언약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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