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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비유 - 버려진 돌을 거부하는 마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15.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누가복음 20:17)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유독 불편한 비유가 있습니다.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기보다, 어딘가 찔리고 불안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20장에 나오는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흔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으로 요약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며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 더 착하게 살아야지. 더 사랑해야지. 더 섬겨야지.” 그러나 정말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하신 말씀이,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수준의 교훈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청중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세리나 창기들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고, 종교적으로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는 비난을 받던 쪽이었습니다(마 11:19). 그렇다면 이 비유는 ‘더 잘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가 지금 잘하고 있다고 믿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놀라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악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위해 합니다. 도덕과 윤리, 종교적 열심마저도 얼마든지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흠이 없고, 말끔하고, 진지해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나’가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바로 그 바리새적인 인간의 내면을 폭로하십니다. “착한 일 많이 해라”가 아니라, “그 착함의 주인이 누구냐?” “그 열심의 목적이 무엇이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이 질문 앞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은혜 위에 슬쩍 우리의 행위와 열심을 얹어 넣습니다. 마치
“하나님, 당신의 은혜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한 나를 봐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2,000년 전 율법주의를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그 예수님이 오늘날 교회에 다시 오셔서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그분을 환영할까요? 아니면 “전도에 방해된다”며 조용히 밀어내고 싶어질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에는 매우 섬뜩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셨지만, 교회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니, 알아보고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은 너무 초라하고, 너무 약하고, 너무 십자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미
‘능력 있는 예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 ‘성공을 보장해 주는 예수’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당신 같은 예수는 전도에 방해가 됩니다.” 이 말은 소설 속 대사이지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너무도 정확하게 찌릅니다. 십자가의 예수, 자기부인을 요구하는 예수, 우리의 처음 자리를 폭로하는 예수는 언제나 불편합니다. 그 예수는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우리의 공로를 무너뜨리며, 우리의 ‘착함’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놀랍게도 이 말들은 모두 과거형입니다. 이미 끝난 사건입니다. 신분적으로, 선언적으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자아 성취를 꿈꾸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이미’‘아직’이라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이미 우리를 죽였지만, 동시에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그 죽음을 실제로 경험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남을 죽이는 세상의 원리와 달리, 하나님 나라는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원리가 실제로 우리 삶에 적용되기 시작하면, 우리의 육적인 삶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자아가 깨지고, 계산이 무너지고,
‘왜 나만 손해 보느냐’는 질문이 쏟아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역사 속에만 묶어 두려 합니다. “난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 축복만 받으면 돼.”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교묘한 방법인 것입니다.

포도원 농부들의 문제는 열매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열매의 주인이 누구인가였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빌려 쓰는 소작인이었지만, 점점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의 종이 와서
“주인의 몫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포도원은 이미 자기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너무 낯설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교회도, 사역도, 신앙의 자리도 어느새
‘내 영역’이 됩니다. 그때 누군가 와서 “회개하라”, “은혜로 돌아가라”, “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방어합니다. 심지어 그 목소리를 제거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아들까지 죽입니다. 은혜의 최종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마저 제거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이 끝까지 붙들고 싶어 하는 ‘나의 주인 됨’을 완전히 부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끝에서 시편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버렸습니다. 쓸모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양도 안 맞고, 약해 보이고, 가치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돌을 집의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그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그 예수입니다.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그 돌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돌 위에 자신을 맡기기보다, 그 돌을 피해 다른 기초 위에 집을 세우려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질 것이고, 그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가루가 될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부서질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무너질 것인가, 자기를 부인하며 은혜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자기를 지키다 심판을 맞이할 것인가....

이 비유는
“더 잘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라”는 초청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포도원을 살고 있는가?” “나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가?” 버려진 돌 앞에 서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주님은 여전히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