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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비유 - 겨자씨가 나무가 될 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12.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복음 13:31~32)

사람들은 대개 작은 것이 크게 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던 것이 어느 날 눈부시게 성장하고, 미약했던 시작이 놀라운 결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언제나 박수가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겨자씨 비유를 읽을 때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이해합니다.
“처음에는 작았지만, 나중에는 크게 번성하는 하나님 나라.” 듣기 좋고, 희망적이며, 열심을 부추기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언제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은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기보다 불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이 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그 나라 안에 악한 자의 씨, 속이는 것, 뒤섞임, 가짜 풍성함이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비유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 문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자기 밭에 겨자를 심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겨자는 어디에나 자라는 식물이었습니다. 갈릴리 전역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굳이 씨를 골라 밭에 심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겨자는 밭을 망칠 수 있는 식물이기도 했습니다. 한번 자라기 시작하면 뿌리가 깊고, 주변 작물을 압도하며,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자기 밭에 겨자를 심었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이
‘이상함’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밭에, 왜 겨자가 심어졌습니까? 그리고 왜 그것이 풀의 자리를 벗어나 나무가 되었습니까?

겨자는 원래 나물입니다. 채소입니다. 아무리 커도 나무가 되는 식물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이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닙니다. 비정상적인 성장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장면을 종종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말씀 중심이었던 공동체가 어느 순간부터 규모와 영향력, 숫자와 외형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작한 사역이, 나중에는 유지와 확장을 위해 복음을 조정합니다. 처음에는 십자가를 말하던 설교가, 어느새 성공과 번영, 긍정과 자기계발로 바뀝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처음엔 작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크게 키워 주셨어요.” “이만큼 커졌다는 건 하나님이 함께하신 증거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묻고 계십니다. “그것이 정말 나무가 되어야 할 씨였느냐?”

문제는 크기 자체가 아닙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누가 그 가지에 깃들이는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성경에서 공중의 새는 종종 악한 영적 존재, 곧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상징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의 씨를 먹어버린 존재도 ‘새’였고, 예수님은 그 새를 분명히 “악한 자”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커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처럼 보이는 것 안에 악한 자가 안착해 버리는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성해 보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활동이 많습니다.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 위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보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은 거대한 나무를 꿈꿉니다. 그 나무는 온 땅에서 보일 만큼 컸고, 모든 생명체가 그 아래서 쉼을 얻었으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는 결국 잘려 나갑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체한 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역시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가 되었고,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크다는 것은, 많다는 것은, 화려하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증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점점 커지는 미완성의 프로젝트”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미 임한 나라,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된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본질은 십자가였습니다. 작아 보였고, 실패처럼 보였으며, 아무 능력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악한 자가 깃들 자리가 없었습니다.

겨자씨 비유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크고 영향력 있는 신앙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에 머무는 신앙을 살고 있는가? 열매보다 나무의 크기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은 우리를 두렵게 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깨어 있으라고, 속지 말라고, 겉모양에 현혹되지 말라고 이 비유를 주신 것입니다.

겨자씨는 작아도 됩니다. 오히려 작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크기로 증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숫자가 늘지 않아도,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도, 십자가의 복음이 온전히 남아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박수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조용히 경고하셨습니다.
“깃들이는 새를 보아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신앙과 교회와 사역을 다시 한 번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