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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언약 -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14.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5,17,25)

우리는 흔히
“믿음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의 행위를 떠올립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 말씀을 잘 아는 태도, 교회에 충성하는 삶, 도덕적으로 흠 없는 인격, 그래서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을 잘 믿어드리는 인간의 태도”쯤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은 이 모든 생각을 단호하게 무너뜨립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바울은 묻습니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느냐?” 이 질문은 사실 유대인들의 자랑을 겨냥한 질문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은 다르다. 그는 믿음의 영웅이다. 그는 순종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잘한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사건’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을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은 아브라함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으키신 사건이었습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을 누군가 흔들어 깨우듯,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던 사람의 삶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개입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불안했고, 계산했고, 거짓말도 했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였고,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하갈을 택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자랑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은 인간의 본능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표현을 씁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래도 뭔가는 해야 하지 않나?”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 질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경건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의롭다 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 다음으로 다윗을 등장시킵니다. 다윗이라면 어떤 인물입니까? 골리앗을 쓰러뜨린 용사,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준 인내의 사람,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한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그런 다윗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다윗 자신은 다르게 말합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다윗의 고백은 자신의 영웅담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충성된 부하의 아내를 빼앗았고, 그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가 그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죄인인 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오기 전까지, 다윗은 평온했습니다. 정의로운 왕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어질 때, 그는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는 진짜 복은 왕좌가 아니라, 죄 사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부요함도, 다윗의 왕권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나도 아브라함처럼 잘될까, 다윗처럼 성공할까”를 묻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분명합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어지는 것,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 복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눈을 열어 주실 때만 보이는 복인 것입니다.

할례는 조건이 아니라 도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이전, 곧 무할례 때였습니다. 할례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의를 확인하는 도장이었습니다.

마치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도장이 계약을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립된 약속을 증명하듯, 할례는 믿음으로 주어진 의를 확인하는 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도장을 조건으로 바꿉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노를 드러냅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능과 불순종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율법 앞에 선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을 먼저 주시고, 모세 율법을 나중에 주십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약속이 먼저이고, 행위는 그 다음인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은 믿음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삭은 처음부터 가능성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사라의 태는 죽은 것 같았고, 아브라함의 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이미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인과율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인협력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홀로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분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 영광의 자리를 비우셨고, 여자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조차 우리가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 말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십니다.

이것이 죽은 데서 살아나는 방식이며, 없는 데서 생기는 믿음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심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결단이 아니라 창조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자를 불러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