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야의 딸 리츠파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 위에 펴고, 곡식을 거두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 위에 쏟아질 때까지, 낮에는 공중의 새가 그 위에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그것들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니라.”(사무엘하 21:10)
성경 속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아브라함, 다윗, 바울과 같은 인물들 외에도, 한 구절, 혹은 짧은 장면에 스쳐 지나가듯 등장하지만 그 안에 깊은 울림을 남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21장에 등장하는 리츠파라는 여인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빨갛게 타는 돌”을 뜻합니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꺼지지 않고 오래도록 열을 내는 화롯불 같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의 삶과 사랑은 그렇게 꺼지지 않는 불과 같았습니다.
리츠파는 단순히 한 어머니로만 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울 왕의 후궁이었고, 아르모니와 므비보셋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고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인의 자리는 남자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사울이 죽자, 그녀는 사울 군대의 장수 아브네르의 차지가 되었고, 이 일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아브네르 사이에 큰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여기서 다시 사라지는 듯 보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리츠파 같은 여인들은 역사의 큰 줄기에서는 쉽게 잊히고 지워져 버립니다. 왕과 장군, 전쟁과 권력 다툼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 속에서, 한 여인의 눈물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윗이 왕이 된 후 사울 왕가의 후손들이 기브온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희생양으로 내어줌을 당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그들에게 넘겼고, 그 중에는 리츠파의 두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리 추수철에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고, 뜨거운 햇볕과 찬비에 그 주검은 길게 내맡겨졌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외면한 자리, 바로 그곳에 리츠파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상복을 가져다 바위 위에 펴고, 새와 들짐승이 아들들의 주검에 다가오지 못하도록 낮과 밤을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비가 내릴 때까지, 몇 달 동안 말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함께 울어주지 않아도, 그녀는 홀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리츠파의 이야기는 매우 ‘동양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면과 권력, 이익이 모든 것을 좌우하던 사회에서, 이름 없는 여인의 눈물과 인내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역사를 움직였습니다.
다윗은 리츠파의 행동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 일곱 명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장사하도록 명했습니다. 잊힌 자들이 명예롭게 묻히게 된 것은, 한 어머니의 꺼지지 않는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리츠파의 이야기는 몇 가지 중요한 묵상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세상은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녀의 이름을 기록했고, 지금 우리는 그 이름을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리츠파는 아들들이 이미 죽은 뒤에도 그 곁을 지켰습니다. 무언가를 바래서가 아니라, 단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황을 초월하는 불과 같습니다. 그리고 작은 불씨가 역사를 바꿉니다. 리츠파의 조용한 행동은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왕가의 후손들이 명예롭게 장사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꺼지지 않는 사랑과 인내는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집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 속에서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 아무도 보지 않는 헌신, 이름 없이 흘린 눈물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리츠파를 통해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불을 보셨다.”
리츠파처럼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을 간직하는 사람, 그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도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불처럼 꺼지지 않는 사랑을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리츠파는 성경 속에서 작게 보이는 이름이지만, 그녀의 사랑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작은 헌신, 작은 인내, 작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 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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