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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나는 에스라인인가, 바리새인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1.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 7:10)

어느 의대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해부학 시험에서 늘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인체의 구조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고, 심장이 어떻게 박동하는지, 폐가 어떻게 산소를 교환하는지 막힘없이 강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매일 밤 술을 마시고,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건강검진 수치는 엉망이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물었습니다.
"너, 몸에 대해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이렇게 살아?" 그는 잠시 멈추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문제잖아." 그 말이 섬뜩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한 의대생의 고백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익숙하게 들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
바리새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립니다. 위선자, 예수님의 적, 껍데기뿐인 종교인,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이었을까요? 바리새인(페루심)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구별된 자'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세속 문화에 녹아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던 신앙의 파수꾼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며, 십일조를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들은 예수님께 가장 강렬한 책망을 들은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구약 에스라 7장 10절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이 한 문장 안에 세 개의 동사가 있습니다. "연구하고 - 준행하며 - 가르쳤다." 에스라는 먼저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자기 삶에 직접 살아냈습니다. 그런 다음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 순서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에스라의 뒤를 이은 사람들에게서 어느 순간 중간 단계가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
연구하고 - 준행하며 - 가르쳤다." 아는 것이 곧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면 그것이 곧 신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에스라의 후계자들은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문제는 요즘 세대가 더 예민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함정입니다. 인스타그램에 '
오늘의 큐티'를 올리는 것과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유튜브에서 유명 설교자의 강의를 매일 듣는 것과 그 가르침이 내 관계와 선택 안에서 살아 숨쉬는 것은 다릅니다. 신학 논쟁에서 날카로운 댓글을 다는 것과 그 진리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은 다릅니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과 말씀을 준행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지금 이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넓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성도는 언제나 오르막길에 있어야 한다." 오르막길은 힘듭니다. 숨이 차고, 다리가 무겁고, 멈추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아무런 부담이 없고 갈등이 없다면, 그것은 평지가 아니라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편한 신앙은 자라는 신앙이 아닙니다.

'
준행함'이 빠질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에스라가 아닌 바리새인이 되면 어떤 증상이 나타날까요? 공식 석상에서의 기도와 혼자 있을 때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교회에서의 말과 집에서의 말이 달라집니다. 진리를 가르치면서 정작 그 진리대로 사는 사람을 보면 불편하고 질투가 생깁니다. 제도와 형식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잃는 선택을 합니다. 이웃 사랑을 설교하면서 가장 가까운 공동체 안의 갈등을 외면합니다.

이런 증상들은 사실 특별히 나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다루는 사람일수록, 가르치는 자리에 오래 있을수록 더 쉽게 나타납니다. 말씀이 삶이 되는 과정 없이 지식으로만 쌓일 때, 그 지식은 오히려 자신을 가리는 갑옷이 되어 버립니다.

에스라인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말씀을 배울 때마다 이렇게 묻는 사람입니다. "
이 말씀이 지금 내 삶의 어느 부분을 향하고 있는가?" 설교를 들을 때 '저 사람한테 꼭 필요한 말씀이다'가 아니라 '이것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다'로 듣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남을 가르치기 위한 재료가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할 지도로 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스라인의 방식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
오직 말씀"을 외쳤을 때, 그것은 말씀을 더 많이 알자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말씀 앞에 더 정직하게 서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설교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인이 부족한 것입니다. 많은 말씀이 선포되지만, 그 말씀을 먼저 자기 뼈에 새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드문 것입니다.

내 안에 바리새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두렵지만 가장 정직한 출발점입니다. '
나는 바리새인이 아니야'라고 안도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바리새인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 안에 서 있습니다. 에스라는 가르치기 전에 먼저 살았습니다. 오늘 내가 알고 있는 그 말씀을, 나는 살고 있습니까?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당신의 삶의 크기는 당신의 자아가 작아질수록 커질 것이다. - G.K 체스터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