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앙으로 사는 삶

은혜와 진리, 두 날개로 나는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어느 교회에 두 집사가 있었습니다. 한 집사는 늘 "
은혜로 해야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누군가 실수를 해도, 약속을 어겨도, 맡은 일을 소홀히 해도 언제나 같은 말을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은혜로 덮어야죠."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좋아했습니다. 마음이 넓어 보였고, 사랑이 많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공동체 안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쌓여 갔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은혜를 말했지만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또 다른 집사는 늘 "
진리가 중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규칙을 어기면 반드시 지적했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분명하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대부분 옳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수한 사람은 회복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상처 입은 사람은 위로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숨기기 시작했고, 공동체에는 냉랭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한 사람은 은혜를 말했지만 진리를 잃어버렸고, 다른 사람은 진리를 말했지만 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은혜만 충만한 분도 아니고, 진리만 충만한 분도 아닙니다.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하신 분입니다. 마치 생명체의 DNA가 두 가닥의 나선이 서로를 붙들고 균형을 이루며 생명을 유지하듯, 하나님의 성품도 은혜와 진리가 함께 어우러질 때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진리만 붙잡으면 모든 것이 명확해 보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용서가 사라지기 쉽습니다. 반대로 은혜만 붙잡으면 모두를 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리가 사라진 은혜는 결국 아무것도 바로잡지 못하는 무기력한 관용이 되고 맙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
값싼 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그렇게 엄격하게 죄를 다루셨을까요? 왜 율법을 주시고 죄에 대한 심판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야 의사의 치료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있습니다. 깊은 물에 빠져 죽어 가던 사람이 구조되었을 때만 구조자의 손길이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있습니다. 죄의 무게를 모르면 십자가의 은혜도 가볍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선명할수록 은혜는 더욱 찬란하게 빛납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눈감아 주지 않으셨습니다. 죄에 대한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죄인을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어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셨습니다. 진리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살려 내신 것입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는 진리와 은혜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아들이 아버지의 자동차를 몰래 운전하다가 사고를 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가 "
괜찮다"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무책임입니다. 반대로 아들을 집에서 내쫓고 관계를 끊어 버린다면 그것은 정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랑은 아닙니다. 좋은 아버지는 잘못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을 품고 함께 문제를 해결합니다. 책임은 묻게 하지만 버리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와 진리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 "
은혜로 합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라는 뜻이라면 그것은 참된 은혜가 아닙니다. 반대로 "진리로 합시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나는 용서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이라면 그것 또한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죄하지 않으셨지만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으셨습니다. 용서하셨지만 진리를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함께 있었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되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진리를 엄격하게 적용하되 은혜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는 은혜를 적용하고 남에게는 진리를 적용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깁니다. 반대로 자신에게는 진리를 적용하고 남에게는 은혜를 적용할 때 공동체는 아름다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의 기준은 오히려 더 높아졌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 대라.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도 죄다. 은혜는 진리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더욱 깊고 높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살아갈 수 있는 힘까지 공급합니다. 은혜는 죄를 덮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일으켜 세우는 능력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무너뜨리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은혜를 통해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회복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은혜와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은혜만 남아도 안 되고, 진리만 남아도 안 됩니다. 새는 두 날개로 날아갑니다. 한쪽 날개가 아무리 강해도 다른 날개가 부러지면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와 진리, 이 두 날개가 함께 움직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의 살아 계신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