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립보서 2:3)
봄비가 내리고 나면 산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작은 실개천이지만, 그 물은 결코 위를 향해 오르지 않습니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좁은 틈을 만나면 비집고 들어가며, 언제나 낮은 곳을 찾아 흘러내려갑니다. 물은 높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더 낮은 곳이 있으면 기어이 그리로 흘러갑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 곧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그렇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흐릅니다. 머무르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잠시 고였다가도, 더 낮은 곳이 있으면 다시 그리로 흘러갑니다. 그 은혜의 강물 안에서 사는 성도는, 자신도 그 물줄기가 되어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 흐름을 가로막는 세 개의 거대한 댐이 있습니다.
첫 번째 댐은 높이 오르려는 마음입니다.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더 높이"를 외칩니다. 더 좋은 학교, 더 높은 직위, 더 넓은 집, 더 많은 팔로워, 사람들은 더 높은 곳에 올라야 비로소 존재가 증명된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1등을 해야 한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낮은 곳'이라는 말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내가 낮은 곳에 있는 저 사람에게 내려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왕이 백성에게 하사품을 내리듯, 내가 베푸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출발점입니다. 낮은 곳은 우리가 내려가는 곳이 아니라, 원래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영어에서 '겸손(humility)'과 '굴욕(humiliation)'은 같은 라틴어 어원 'humilitas'에서 왔습니다. 이 두 단어는 외형적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속이 전혀 다릅니다.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면 겸손이 됩니다. 그러나 그 자리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다가 수치스럽게 끌려 들어가면 굴욕이 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는 누가 보아도 굴욕의 자리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죄인에게 내리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걸어가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 자발적인 낮아지심이 십자가를 굴욕이 아닌 겸손의 절정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난이 깊을수록 그 겸손은 더 밝게 빛났습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밑만 쳐다보는 사람은 위에 계신 분이 누구이신지 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입니까? 아무리 똑똑해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아무리 능력 있어도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 아래, 낮은 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마 18:4)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권력 게임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조종하거나 이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에게도 편견 없이 다가갑니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를 알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손을 내밉니다.
두 번째 댐은 나누고 차별하는 마음입니다. 낮은 곳을 거스르는 두 번째 흐름은 분열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꼬리표를 붙입니다. 학력, 직업, 재산, 출신 지역, 나이, 외모, 그 꼬리표에 따라 상자에 분류하고, 상자별로 대우를 달리합니다. 같은 말도 꼬리표가 다르면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보십시오. 그 교회에는 뛰어난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의 기초는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그들 사이에 분열의 싹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허영심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낮은 곳으로 향하는 마음입니다.
물을 생각해보십시오. 산 이쪽에서 흘러내린 물과 저쪽에서 흘러내린 물은, 낮은 골짜기에서 만나 하나가 됩니다.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렀지만, 낮은 곳에서는 하나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낮은 곳으로 향할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분열은 언제나 높은 곳을 차지하려는 다툼에서 시작됩니다.
한국전쟁 때 이야기입니다. 전쟁 중에 한 마을에서 출신이 다른 두 피란민이 만났습니다. 평상시라면 절대 어울리지 않았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폭격 속에서 좁은 방공호로 함께 뛰어들었습니다. 그 어둡고 낮은 구덩이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았습니다. 낮은 곳이 그들을 하나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낮은 곳으로 함께 내려갈 때, 우리를 갈라놓던 꼬리표들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세 번째 댐은 기득권을 붙잡으려는 마음입니다. 세 번째 흐름은 가장 견고합니다. 기득권입니다. 자신이 가진 지위, 권력, 재산, 명예를 손에 쥐고, 그것으로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발이 더러운 것은 노예가 처리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남의 발을 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요 13:4~5).
베드로가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말릴 만큼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셨습니다. 그 어떤 기득권보다 높은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권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사람이 되셨고, 사람 중에서도 종이 되셨고, 종 중에서도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낮은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신 분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우리 손에 있는 기득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는 데 쓸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발판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같은 기득권이지만, 어느 방향을 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이 됩니다.
테레사 수녀는 "나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작은 연필에 불과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인 명성, 영향력, 재능은 자신을 위해 쓰이지 않았습니다. 콜카타의 가장 낮은 곳, 죽어가는 사람들 곁으로 흘러갔습니다.
봄비가 다시 내립니다. 산 위에서 시작된 물은 바위를 돌고, 흙을 적시고, 마른 땅을 살리며 흘러내려갑니다. 머무르지 않습니다. 더 낮은 곳을 찾아 계속 흐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그 은혜 안에 사는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높은 곳을 향하는 본능을 거슬러, 낮은 곳으로, 나누고 차별하는 습관을 거슬러, 낮은 곳으로, 기득권을 붙들려는 욕망을 거슬러, 더 낮은 곳으로 말입니다.
낮은 곳이 겸손의 자리요, 하나 되는 자리요, 섬김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낮은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닳아서 낡은 성경책을 소유한 사람은 결코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 찰스 스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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