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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7.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세기 33:10)

야곱은 밤새 떨었을 것입니다. 이십 년 전, 그는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도망쳤습니다. 그 후 라반의 집에서 풍요를 얻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형의 얼굴이 어른거렸습니다. 이제 그 형이 사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야곱은 재물을 나누고, 가족을 분산시키고,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계산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얍복 나루터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홀로 어떤 존재와 씨름했습니다. 날이 밝아 올 때까지 그 씨름은 끝나지 않았고, 결국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습니다. 절뚝이며 새벽을 맞이한 야곱은 더 이상 예전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이름도 바뀌었습니다. '
발꿈치를 잡는 자'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곧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 에서를 만났습니다. 에서는 달려와 야곱을 안았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십 년의 세월이, 그 모든 상처와 배신의 기억이 그 포옹 속에서 조용히 녹아내렸습니다. 야곱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세기 33:10) 이 고백은 단순한 감사의 인사가 아닙니다. 야곱은 형의 얼굴 안에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된 화해가 이루어졌을 때, 사람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이 됩니다. 그것이 화해의 신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와 화해를 혼동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용서는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사과하지 않아도, 감정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도, 심지어 그 사람을 다시 만나지 않아도 용서는 가능합니다. 용서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결단입니다. 어쩌면 용서는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원망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해는 다릅니다. 화해는 반드시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값싼 화해란 없습니다. "
그냥 없었던 일로 합시다"라고 악수하는 것은 화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를 덮어 두는 것일 뿐이며, 언젠가 반드시 곪아 터집니다.

어느 작가는 용서와 화해의 차이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용서는 높은 산을 오르는 도중에 멀리서 들려오는 폭포 소리와 같습니다. 발이 아프고 목이 마르고 온몸에 땀이 흐르지만, 그 소리가 들리면 정상을 향한 기대가 생깁니다. 반면 화해는 마침내 산 정상의 호수에 발을 담그는 것입니다. 맑은 물을 손으로 떠 마시고, 발끝에서 올라오는 그 시원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폭포 소리를 듣는 것과 호수에 발을 담그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둘 다 소중하지만, 화해는 용서보다 더 멀리, 더 깊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엘론이라는 유태인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차를 몰고 팔레스타인 무슬림 마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청각장애를 가진 한 아이가 갑자기 차 앞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엘론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이 마을은 유태인을 증오하는 곳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면 그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이라면 당장 도망치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이미 숨이 끊긴 아이를 품에 안고, 마을 사람들이 올 때까지 울면서 기다렸습니다.

마을 전체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가운데,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가해자인 유태인이 도망치지 않고 아이를 안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 즉각적인 보복의 분노가 잠시 멈추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슬람 법정에 서라는 날짜를 통보하고 그를 보내주었습니다. 사실상 아무도 그가 돌아오리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법정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
하나님이 길을 여신 거야. 돌아가지 마." 그러나 엘론은 주님의 음성을 느꼈습니다. "돌아가라. 법정에 서라." 그는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판사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죽은 아이의 가정에 가족으로 입양될 것, 마을을 지날 때마다 그 가족을 방문하고, 함께 밥을 먹을 것, 유태인 엘론은 예수님의 가정에 입양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무슬림 가정에도 입양되었습니다. 정의가 세워졌고, 용서가 흘렀고,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식탁에서 두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 순간, 수천 년의 원한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얼굴이 그 자리에 나타났을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화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 야곱을 먼저 바꾸셨습니다.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더 이상 자기 힘으로는 달아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화해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믿는 사람에게 먼저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갈등을 겪고 있다면,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모두 믿는 사람이라면, 더 깊이 믿는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논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먼저 손을 내미셨기 때문입니다. 화해의 첫걸음은 항상 더 강한 자, 더 은혜를 많이 받은 자의 몫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 두 사람이 분쟁을 벌이다가 결국 대법원까지 소송을 끌고 갔습니다. 그 사건을 맡은 대법관은 불교 신자였습니다. 사건을 들여다본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악수만 하면 끝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까지 왔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앞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제가 듣기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끼리는 절대 화해하지 않는다더군요. 어디 한번 끝까지 싸워 봅시다." 두 사람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화해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슴을 찌릅니다. 화해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잘해야 할 일인데, 어쩌면 가장 못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찬양하는 입술이, 바로 옆 사람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 찬양이 어디로 닿겠습니까?

요한일서는 말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한일서 4:12) 아무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할 때, 우리는 서로의 얼굴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이 형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을 보았듯이, 엘론이 자신이 다치게 한 아이의 가족의 얼굴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거기 계셨듯이,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 안에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화해는 부담이 아닙니다. 화해는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야곱처럼, 절뚝이며라도 그 여정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새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형의 얼굴에서, 이웃의 얼굴에서, 오랫동안 외면했던 그 사람의 얼굴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 곧 복음에는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하게 하는 힘이 있다. - C.S 루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