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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마음의 시계를 영원에 맞추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7.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5:13)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벚꽃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은 금세 사라지는가, 꽃잎이 지는 것을 막을 수 없듯, 흘러가는 시간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어제의 청년이 오늘은 거울 앞에서 흰머리를 발견하고, 그제의 부모가 오늘은 자식의 부축을 받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보다 빠릅니다.

그런데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앨런 랭어는 이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실험을 감행했습니다. 1979년, 그는 70~80대 노인들을 데리고 미국의 한 외딴 수도원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1959년의 세계가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신문, 그 시절의 라디오 음악, 그 시절의 흑백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노인들은 마치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 시절의 자신으로 살아가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일주일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억력이 향상되었습니다. 악력이 세어졌습니다. 굽었던 허리가 펴지고, 느렸던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측정 가능한 수치들이 실제로 좋아졌습니다. 한국의 EBS 방송국도 이 실험을 재현해 "
황혼의 반란"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동일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몸이 마음을 따라간 것입니다. 마음이 20년 전으로 돌아가자, 몸도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랭어의 실험은 우리에게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마음의 시계를 과거가 아닌 미래로, 그것도 훨씬 더 먼 영원으로 돌려놓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간은 희망으로 삽니다. 이것은 낭만적 선언이 아니라 생물학적 사실에 가깝습니다. 심리학 실험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연구자들이 크기가 비슷한 두 마리의 쥐를 각각 물이 가득 찬 통에 넣었습니다. 두 통의 차이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는 뚜껑이 닫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열려 있었습니다. 닫힌 통 속의 쥐는 본능적으로 헤엄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헤엄쳐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4분이 채 되지 않아 그 쥐는 헤엄치기를 포기하고 가라앉아 죽었습니다. 반면 열린 통 속의 쥐는 36시간을 쉬지 않고 헤엄쳤습니다. 출구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말은 이것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습니다. 몸이 서서히 무너지는 병이 있듯, 영혼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병에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대한 재난 앞에서만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사소한 실패 앞에서도, 작은 상처 앞에서도 너무나 쉽게 무너집니다.

왜 그런가요? 뿌리를 자른 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멀쩡해 보입니다. 잎도 달려 있고, 줄기도 단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시들기 시작합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눈치채기 어려운 쇠락입니다. 인간의 절망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갑자기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근거를 잃은 나무처럼, 서서히 희망을 잃어가며 절망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수용소에서 가장 먼저 죽은 사람들은 체력이 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살아야 할 이유,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가족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희망을, 누군가는 자신의 연구를 마쳐야 한다는 사명을, 누군가는 이 경험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붙들었습니다. 희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은 생존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희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붙든 희망이 산산조각 날 때, 내가 기다리던 미래가 끝내 오지 않을 때, 인간의 희망은 그 자리에서 절망으로 바뀝니다. 믿었던 사람이 돌아서고, 쌓아온 것들이 무너지고, 몸이 병들고,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날 때, 그때 인간의 희망은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납니다. 진정한 희망은 이 세상의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근거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근거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결코 사람들에게 달콤한 거짓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
당신은 사실 괜찮습니다"라고 하지 않으셨고, 죄인에게 "당신의 삶은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은 언제나 희망과 함께였습니다. 죄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시되, 동시에 그 죄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독특함입니다. 현실을 외면한 낙관주의도 아니고, 미래를 포기한 비관주의도 아닌, 진실을 품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십자가에서 군중의 조롱, 제자들의 도망,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는 그 순간, 제자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앞에서 울었고,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는 "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과거 시제로 말했습니다. 희망은 이미 '바랐던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무덤이 열렸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한 사람의 소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선언이었습니다.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절망이 결론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모든 절망을 함께 묻어버린 죽음이었고, 부활은 그 자리에서 솟아오른 영원한 희망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절망의 죽음이요, 부활은 희망의 살아남입니다.

앨런 랭어의 실험에서 마음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렸을 때 몸이 젊어졌다면, 마음의 시계를 영원으로 향하게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소망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17). 현재의 고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시계가 영원에 고정되어 있을 때, 현재의 무게가 달리 보입니다.

선교사 에릭 리델은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다가 일본 강점기에 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었고, 결국 수용소 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한 사람들은 훗날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의 시계는 이 세상의 조건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다르게 삽니다. 같은 고난 속에 있어도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닫힌 뚜껑을 향해 4분 만에 포기한 쥐와, 열린 하늘을 향해 36시간을 헤엄친 쥐처럼 말입니다. 차이는 환경이 아니라, 바라보는 방향이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아마도 어떤 절망의 계절을 지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거나, 관계가 무너졌거나, 오래 기다리던 것이 끝내 오지 않았거나, 그 고통이 진짜임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도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절망에 가까운 자리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결론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십자가가 끝인 줄 알았으나 부활이 있었던 것처럼, 광야가 끝인 줄 알았으나 가나안이 있었던 것처럼, 겨울이 끝인 줄 알았으나 봄이 있었던 것처럼, 마음의 시계를 영원에 맞추십시오. 그것이 이 세상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희망의 삶인 것입니다.

인생이란 앞을 향해 있지만 뒤늦게 깨닫게 되는 법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