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녀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시간이 하루에 몇 시간인지 측정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앱 회사들은 이용자의 사용 시간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만들었는데, 처음 그 숫자를 확인한 사람들 대부분이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우리는 분명 그것들을 "원해서" 보고 있습니다. 강제로 시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그만하겠다"고 결심하면, 손이 저절로 앱 아이콘을 향해 움직입니다. 자유로운 선택입니까, 아니면 습관이라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입니까?
자유의 상징은 언제나 하늘을 나는 새입니다. 그런데 조류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을 보고합니다. 오랫동안 새장에 갇혀 있던 새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날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날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누릴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그 새를 닮은 건 아닐까요? "자유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답을 내놓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것." 그럴듯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절반만 맞습니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자유"는 결국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마저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연주가 좋아서 피아노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곡만, 연습하기 싫은 날엔 쉬고, 불편한 기술은 건너뛴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그는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 아름다운 음악을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건반 위의 진정한 자유는 수없이 반복되는 훈련이라는 "한계"를 받아들인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자유란 단순히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인류 최초의 이야기는 이 진리를 매우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단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 한계는 억압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수영장에 "익사를 막기 위한" 안전선이 있는 것처럼, 그 한계는 자유를 지속시켜 주는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울타리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규칙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무너뜨렸습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들은 자유인이 된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수치, 죄책감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한복음 8:34) 규칙을 깨뜨린다고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종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20세기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날카로운 역설을 지적했습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자유가 없었습니다. 태어나면서 신분이 정해졌고, 그 신분대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 개인의 자유가 주어지자 사람들이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부터 도망쳤습니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자유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정치적 자유와 물질적 풍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세대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안장애와 우울증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있지만,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중독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알코올, 마약, 도박, 포르노, SNS 등 이름은 달라도 본질은 같습니다. 몸은 자유롭지만 마음은 종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자유인입니까, 종입니까? 이것을 알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멈출 수 있는가?"를 보십시오. "무엇을 차지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를 보십시오.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멈출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스마트폰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내려놓기로 했을 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예수님은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정한 자유는 모든 제약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도록 지음 받았는지를 아는 데서 옵니다. 창조주를 떠난 자유는 방향을 잃은 배와 같습니다. 노를 저을 자유는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결국 표류하다 암초에 부딪힙니다.
새장 문이 열렸습니다. 날개도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날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 날개는 하고 싶은 것을 무한정 하는 능력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기쁘게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그 선택이 시작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지음 받은 하늘을 날기 시작할 것입니다.
100명 중 1명은 성경을 읽고, 나머지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 D.L.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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